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제동을 걸기 위해 반도체 제품과 장비에 이어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 수출 통제까지 나섰다. 하지만 중국 반도체 업계는 ‘이가 없으면 잇몸’ 식으로 해결하며 반도체 자립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반도체 등 미중 무역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동아일보 DB
10일 외신 및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말 미국 정부는 시놉시스와 케이던스, 지멘스 등 주요 전자설계자동화(EDA) 소프트웨어 업체에 중국 수출 중단을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한 것으로 전해졌다.
EDA는 반도체 설계와 검증에 필수적인 기술로, 노광장비와 함께 중국 반도체 산업의 가장 ‘약한 고리’ 중 하나로 분류된다. 현재 미국산 소프트웨어가 전체 시장의 70% 이상, 중국 시장의 80% 안팎을 점유하고 있다.
이러한 조치는 중국의 인공지능(AI) 반도체 자립을 막기 위해 반도체 제품과 장비 수출 규제를 한 단계 뛰어넘는 기술 규제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이에 굴하지 않고 2030년까지 반도체 국산화율을 70%까지 늘리는 목표를 추진 중이다. 이를 위해 ‘국가 직접회로 산업 투자 펀드’를 조성하고 EDA 및 반도체 장비 분야에 대규모 투자를 집행하는 등 약한 고리를 끊어내려 노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 EDA 업체 엠피리언 테크놀로지는 2023년 14나노 공정(nm·1nm는 10억분의 1m)을 지원하는 EDA 툴을 상용화했고, 곧장 공정을 크게 뛰어넘어 현재는 7나노 공정 수준에 근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는 화웨이가 2023년 메이트60 프로에 탑재한 7나노급 공정의 AI 칩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엠피리언 테크놀로지가 협력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직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 기업의 5나노 이하 공정 기술력에는 못 미치지만, 빠른 속도로 기술력이 발전하고 있다는 평가다.
AI 반도체 칩을 형상화한 모습. 뉴시스
대중 반도체 규제에 대항해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대체하는 중국의 대응 방식은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수출통제 사례에서도 잘 나타난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은 올 2월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SMIC가 7나노급 공정이 필요한 화웨이의 AI 칩 수율을 40%까지 끌어올렸다고 전했다. 업계에선 수율이 60%를 넘어서면 상용화에 근접한 것으로 본다.
고도의 미세공정이 필요한 AI 칩 생산에는 EUV 장비가 필수적이지만 SMIC는 EUV를 사용하지 않는 이른바 ‘N+2’ 공정을 활용해 저사양 장비인 심자외선(DUV)만으로 수율을 끌어올린 것으로 전해졌다. DUV로는 한 번에 미세한 회로를 새길 수 없어 여러 번 노광과 식각을 반복해 회로를 새기는 방식이다. FT는 “미국의 수출통제에도 중국이 AI 인프라 마련에 획기적인 진전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이 때문에 미국이 중국에 대한 반도체 규제를 강화할수록 오히려 중국의 반도체 자립이 빨라라질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부 교수는 “이번 EDA 수출 규제로 3나노급 초미세 공정 등에서 표면적으로 중국 팹리스(반도체 설계) 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다”면서도 “중국 팹리스 업체들이 최소 5년 전부터 미국 업체의 EDA를 불법 복제하거나 개조한 제품 등을 활용하고 있어 타격 규모가 아주 크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 교수는 “미국의 대중 규제가 바이든 정부에서 추진했던 수준의 핀포인트 제재를 계속 이어가지 않는 한 오히려 중국 반도체 자립을 촉진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종민 기자 bli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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