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공격해 지지자 결집…이념 전쟁 축소판
명문대 쫓아낸 헝가리에 밴스 "효과적 대처"
흔들리는 고등교육·혁신…공화당서도 우려
편집자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세계 최고 명문인 하버드대를 정조준하며 미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대학가의 반(反)유대주의 확산을 이유로 주요 대학의 연방정부 재정 지원을 대폭 줄이고, 하버드에는 외국인 학생 등록 자격까지 박탈하는 초강수를 뒀다. 표면적으로는 반유대주의 근절이 명분이지만, 하버드를 좌파 기득권의 상징으로 낙인찍고 진보 진영과의 '문화 전쟁'을 벌이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미국 고등교육의 상징이자 세계 인재의 중심인 대학 캠퍼스가 이제 이념 전쟁의 최전선으로 내몰리면서 학문의 자유와 미국의 국가 경쟁력까지 위협받고 있다는 우려가 내부에서 나온다. 아시아경제는 이에 3회에 걸쳐 트럼프 대통령과 미 명문대 간 충돌 양상을 조명하고 그 정치·사회적 함의를 짚어본다.
트럼프 대통령의 하버드 때리기가 나날이 거세지고 있다. 겉으로는 반유대주의가 팽배하며, 외국인 학생들이 너무 많은 데다 중국과 연관돼있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거센 적개심에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막내아들 배런 트럼프가 하버드에 떨어져서 그런 게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온다. 그러나 반유대주의와 안보 우려 뒤에는 엘리트주의에 대한 공화당 지지자들의 반감과 진보와의 이념 싸움이라는 이유가 숨어있다.
하버드 공격, 안전한 선택이자 이념 전쟁
2024년 기준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미국인은 유권자의 59%에 달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저학력 백인 노동자 계층을 핵심 지지층으로 두고 있다. 상당수가 명문대를 향한 공격에 거부감이 없다.
야후 파이낸스는 명문대 때리기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정치적으로 매우 안전한 공격이라고 분석했다. 이 매체는 "(민주당이) 노동 계급을 등한시한 것이 바로 트럼프 대통령이 두 번이나 당선되는 데 일조한 원동력"이라며 "미국은 대학 진학을 앞둔 젊은이들이 적절한 기술과 집중력만 있다면 얼마든 취업할 수 있는 보람 있는 직업을 갖도록 준비하는 데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트럼프 대통령의 명문대 공격이 진보와의 이념 전쟁 축소판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이비리그 대학이 민주당의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과 이념을 재생산한다고 본다. 특히 하버드는 미국 엘리트의 상징적 존재인 만큼 최전선에서 공격받는 것이다. 영국 BBC 방송은 많은 우파가 오랫동안 자신들의 견해가 대학 강의실에서 외면당했다며 명문대를 소위 '깨달음(wokeness)'의 온상으로 여긴다고 짚었다. 그 예로 1960년대 반전주의부터 1990년대 정치적 올바름, 2000년대 월가 점거 운동과 반자본주의, 최근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과 반이스라엘 시위 등이 있다.
보수 단체 터닝포인트USA의 설립자인 찰리 커크는 지난달 폭스 뉴스 인터뷰에서 "대학은 지식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라 좌파적 세계관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곳"이라고 비판했다.
정치학자 제이슨 존슨 모건 주립대 부교수는 "그들의 목표는 미국의 고등 교육 기관을 위협하고 무너뜨리는 것"이라며 "왜냐하면 그들의 권위주의적 경향에 대한 저항이 대부분 그곳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국 보스턴에 위치한 하버드대 캠퍼스. AFP연합뉴스
反엘리트주의 전쟁에 명문대 쫓아낸 헝가리…밴스 "효과적"
실제로 헝가리에서는 '유럽의 트럼프'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대학의 자유주의, 엘리트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중앙유럽대학교(CEU)를 공격하고 쫓아낸 사례가 있다. 현재 CEU는 헝가리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자리를 옮겼다. 마이클 이그나티에프 전 CEU 총장은 오르반 총리의 CEU 공격과 트럼프 대통령의 하버드 공격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하버드 공격은 아이비리그 대학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벌어질 전투는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그나티에프 전 총장은 CEU 축출이 많은 보수세력에 영감을 줬다며 J.D. 밴스 부통령의 지난해 인터뷰를 언급했다. 당시 상원의원이던 밴스 부통령은 "보수주의자들이 대학 지배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한 사례는 오르반 총리의 접근 방식"이라며 "그 방식이 우리에게 본보기가 돼야 한다. 대학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생존과 덜 편향된 교육 방식 중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밴스 부통령은 2022년에도 유명 잡지 배니티 페어와 인터뷰에서 "나는 우리가 좌파 제도를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일종의 바트당 해체 프로그램(사담 후세인의 바트당 출신 인사 축출), 탈 각성주의(de-woke-ification)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 4월 17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교육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 EPA연합뉴스
고등교육 붕괴하나…공화당 일각서도 우려
그러나 이러한 갈등으로 고등 교육 전반이 붕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히 지난달 26일 하버드에 30억달러(약 4조원) 보조금을 지급 중단하고 직업 학교들에 주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계획에 대학의 국제적 경쟁력을 하락시키고 공공 신뢰를 뒤흔들 수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하버드에 대한 공격이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 중 일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정부의 고등 교육 장악 시도라는 점을 대다수 사람이 인식하고 있고, 우려한다고 전했다.
AP-NORC 공공정책 연구센터가 9일 발표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의 56%는 대학에 대한 연방 지원금 유지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AP통신은 "이 여론조사는 트럼프 행정부가 대학을 겨냥하는 것과 미국인들이 대학을 과학 연구, 혁신 기술의 핵심으로 보는 것 사이에 괴리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공화당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돈 베이컨 하원의원(네브래스카주)은 미 의회 전문 매체 더힐에 "하버드가 유대계 미국인 학생들 보호에 실패했지만, 정부 대응 방식에는 우려한다"며 "행정부가 국내 기관에 전쟁을 선포하는 듯한 태도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우리는 독재국가가 아니다"고 말했다.
오수연 기자 syo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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