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윤경신 두산 핸드볼팀 감독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스포츠 스타들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 종목을 막론하고 대한민국 스포츠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찍어낸 전설들의 화려했던 전성기 시절과 현재의 삶을 조명하고 은퇴 후 제2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자신만의 건강 관리법 등을 함께 들어봅니다.
윤경신 두산핸드볼팀 감독이 2일 경기 의정부종합운동장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한국 스포츠팬들은 글로벌 스타로 차범근, 박찬호, 류현진, 손흥민, 김연경 등을 떠올린다. 이들이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는 저마다 남긴 엄청난 업적 때문이겠지만, 그 밑바탕에는 4대 구기 종목(축구 야구 농구 배구)의 인기와 위상이 깔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윤경신 두산 핸드볼팀 감독은 억울한 면이 있다. 그는 차범근 이후 독일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한국 스포츠 스타이자 세계 핸드볼계의 ‘리빙 레전드’지만, 비인기 종목 선수라는 점 때문에 정작 국내에서의 인지도는 여타 글로벌 스타에 비해 떨어진다. 1990~2000년대 현역 선수로 세계 핸드볼계를 풍미한 뒤 현재는 지도자로 국내 핸드볼리그(H리그)를 평정하고 있는 윤 감독을 2일 경기 의정부종합운동장에서 만났다.
"원래는 축구 골키퍼를 하려고 했어요."
역대 최고의 핸드볼 선수로 꼽히는 윤 감독의 입에서 다소 의외의 말이 나왔다. 핸드볼과의 첫 인연을 소개해달라는 질문에 그는 "서울 숭곡초에 축구부가 있어서 골키퍼로 테스트를 봤다"며 "동갑내기이자 같은 경희대 출신인 이운재와 '라이벌이 될 뻔했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고 말한 뒤 웃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축구가 아닌 핸드볼을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됐다. 윤 감독은 "골키퍼 테스트를 본 후 뭔가 맘에 들지 않아 클럽활동으로 핸드볼을 시작했다"며 "농구 배구는 TV에서 많이 봐왔지만, 핸드볼은 생소한 스포츠라 강한 호기심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또래에 비해 큰 키(당시 164㎝)와 왼손잡이라는 희소성에 운동선수였던 부모님의 유전자까지 물려 받은 그를 지도자들이 그냥 둘 리 만무했다. 결국 핸드볼부가 있는 인근 숭덕초로 전학을 가게 됐고, 엘리트 코스를 밟기 시작한 그는 급성장했다.광운중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윤경신 감독. 한국일보 자료사진
윤 감독은 고교 1학년 때 국가대표 상비군에 발탁됐고, 이듬해 대표팀 막내로 합류했다. 비록 주전은 아니었지만 1990 베이징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도 출전했다. 성인이 된 뒤부터는 본격적인 전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1993 스웨덴 세계선수권대회(41골)와 1995 아이슬란드 세계선수권(86골)에서 득점왕으로 올라섰고, 이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핸드볼 종주국 독일로 진출했다.
윤 감독은 "1995년 세계선수권이 끝나고 많은 외국팀들이 러브콜을 보내왔다"며 "그중에서도 독일 Vfl 굼머스바흐 구단은 당시 회장이 직접 한국을 찾아올 만큼 성의를 보였다"고 밝혔다. 갓 성인이 된 청년에게 다소 생소할 수 있는 무대였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윤 감독은 "어렸을 때부터 독일에 진출하는 게 꿈이었는데, 회장이 직접 올 정도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3일 만에 계약했다"며 "금전적 조건 역시 2억2,000만~2억4,000만 원으로 시작해서 5년 정도 후에는 그 두 배 정도로 오를 만큼 좋았다"고 부연했다.윤경신의 독일 진출을 알리는 일간스포츠 1995년 11월 2일자 기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방인이 흔히 겪는 언어장벽과 인종차별 문제 등도 그는 빨리 이겨냈다. 윤 감독은 1996년 굼머스바흐에 정식 입단한 후 HSV 함부르크(2006~2008년)에서 유럽 생활을 마칠 때까지 리그 득점왕을 7차례나 차지했다. 이 중 1998~99시즌부터 2001~02시즌까지는 4연속 득점왕에 오르며 절정의 기량을 발휘했다. 더불어 2023년 5월 한스 린드버그(덴마크)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리그 통산 득점 1위(2,905골) 기록도 가지고 있었다. 윤 감독은 "(통산 득점 2위로 밀려난 게) 아쉽긴 하다"면서도 "그러나 긴 시간 해당 부문 1위를 지켰다는 것은 그만큼 큰 부상 없이 열심히 선수 생활을 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강조했다.
당연히 팬들의 사랑도 듬뿍 받았다. 그는 "독일에서 핸드볼은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가 즐기는 스포츠로, 축구 다음으로 인기가 높다"며 "내가 함부르크로 이적할 당시에 굼머스바흐 팬들이 '모금을 해서 연봉을 주겠다'고 했을 정도다. 굼머스바흐 마지막 경기에는 2만여 명의 팬들이 경기장을 찾아 가로 10m·세로 30m짜리 대형 유니폼을 선물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윤경신의 독일 분데스리가 올스타 선정 소식을 전한 일간스포츠 2001년 5월 15일자 기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명실상부한 분데스리가 최고의 스코어러로 군림했던 윤 감독도 마지막까지 맞추지 못한 퍼즐 한 조각이 있다. 바로 리그 우승이다. 이에 대해 그는 "물론 아쉽다"면서도 "다만 처음 굼머스바흐에 입단했을 때는 팀이 16개 구단 중 13위 정도에 머물렀는데, 내가 함부르크로 떠날 때는 3위까지 올라섰다"고 밝혔다. 약팀을 상위권에 올려놓은 데 나름의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어 "함부르크에서는 슈퍼컵과 유럽핸드볼연맹(EHF)컵 정상에 등극했다"며 우승에 대한 갈증을 어느 정도 풀었다고 설명했다.
유럽무대에서 충분히 경쟁력이 남아 있던 2008년 윤 감독은 돌연 한국 복귀를 택했다. 오랜 외국 생활로 윤 감독과 가족 모두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도 나지만, 아내도 향수병에 걸렸다"며 "또 유치원에 가야 하는 아들이 한국어도 독일어도 제대로 못 하는 걸 보고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고 전했다. 결국 두산 유니폼을 입게 된 그는 3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린 뒤 2012년 런던 올림픽을 끝으로 화려한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윤경신(맨 앞)이 2012년 7월 29일(한국시간) 영국 런던 올림픽파크 메인스타디움에서 열린 런던 올림픽의 개막식에 한국 대표팀의 기수로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 사진
그리고 그는 이때 또 한 번 큰 변곡점을 만났다. 윤 감독은 "애초 두산 유니폼을 입을 때 조건 중 하나가 보수를 받으면서 대학원을 다니는 것이었다.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었다"며 "그런데 (2012년 런던 올림픽) 플레잉코치를 한 일이 계기가 돼서 2013년부터 두산에서 지휘봉을 잡게 됐다"고 전했다.
부임 초기에는 지도자 경력이 적은 윤 감독에게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지기도 했다. 스스로도 감독직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힘들었다"며 "아무래도 직전까지 선수였기 때문에 개인적인 성향이 남아 있었고, (스타플레이어로서) 선수들과 눈 높이도 달랐다"고 부임 초창기를 회상했다.
그러나 윤 감독은 지도자로서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2015년 SK 핸드볼 코리아를 시작으로 올해까지 정규리그와 챔피언전 통합 10연패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국내 모든 구기종목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이 때문에 핸드볼계에는 '어우두(어차피 우승은 두산)'라는 신조어도 만들어졌다. 윤 감독은 "감독에 부임하고 1, 2년이 지나면서 노하우가 쌓이자 성적이 나기 시작했다"며 "선수들도 워낙 착하고, 구단에서도 지원을 잘 해준 덕분"이라고 주변인들에게 공을 돌렸다.윤경신 감독과 두산 핸드볼 팀 선수들이 4월 26일 서울 올림픽공원 핸드볼 경기장에서 열린 2024~25 핸드볼 H리그 남자부 챔피언결정전 3차전에서 SK를 26-22로 누른 후 우승을 차지하고 기뻐하고 있다. 한국핸드볼연맹 제공
겸손함이 묻어난 말이었지만, 사실 그는 지난 10년간 누구보다 치열하게 승리를 위해 싸웠다. 특히 2022~23시즌을 앞두고 기존 우승 멤버인 구창은, 황도엽, 나승도 등이 팀을 떠났을 때는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대학 선수 5명(김명종, 김지운, 이준희, 김태웅, 김민규), 이적생 1명(임경환), 전역생 1명(하무경) 등 새로운 피를 수혈해 위기를 극복했다. 당시 '젊은 피'였던 김연빈이 팀 내 최다 득점(100골)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을 잡았고, 골키퍼 김동욱도 정규 리그 방어율 1위(44.56%)에 오르는 등 골문을 든든히 지켰다. 무엇보다 윤 감독의 역습·속공 위주의 경기 운영이 빛을 발한 시즌이었다.
선수와 지도자로 모든 것을 다 이룬 듯하지만, 그에게도 아쉬움은 있다. 1992년부터 2000·04·08·12년까지 5차례나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정작 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다. 세계선수권에서도 한국은 늘 순위권 밖이었다. 냉정하게 말해 아시아(아시안게임 금메달 5개)를 벗어난 세계무대에서는 대표팀의 일원으로 이렇다 할 발자취를 못 남겼다. 그가 은퇴한 뒤 한국 대표팀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대회부터 지난 프랑스 대회까지 한국은 올림픽 본선에도 오르지 못했다.가슴에 태극마크를 단 윤경신(가운데)이 2000 시드니 올림픽 당시 이집트 수비수들 사이를 비집고 강력한 점프 슛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는 "태극마크를 달고 우승을 잘 못 하다보니 젊은 선수들이 대표팀에 잘 안 들어가려고 한다"며 "그사이 중동세가 많이 올라왔고, 일본마저도 우리를 따라잡았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또 막상 대표팀에 들어가도 2, 3주 훈련을 하고 대회를 나가야 하다 보니 팀워크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 예전에 대학생들을 많이 뽑아 선수촌에서 6~8개월 훈련을 했던 것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라고 덧붙였다.윤경신 감독이 2일 경기 의정부종합운동장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그의 진단은 자연스럽게 대표팀 역량 강화를 위한 방안으로 이어졌다. 윤 감독은 "현재 대학 선수들은 1년에 10게임 정도만 치르다 보니 동기부여가 안 되고 있다. 엘리트가 아닌 동아리 수준"이라며 "대학 선수를 다수로 두고 소수의 H리그 선수들로 대표팀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제대회 경쟁력은 리그 흥행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핸드볼 프로화를 추진 중인 연맹과 협회가 월드클래스의 제언을 곰곰이 되새겨 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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