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과학관, ‘조선의 악기, 과학을 울리다’ 전시
전통 악기 속 과학, 수학 원리 소개해 관심
인공지능이 작곡한 국악 연주도 선보여
영국 런던 주영한국문화원에서 열린 '조선의 악기, 과학을 울리다' 전시에서 현지 관람객이 우리 전통 악기인 '어'를 연주하고 있다./국립중앙과학관
지난 4월 3일 영국 런던의 주영한국문화원에 수백명이 모였다. ‘과학의 귀로 듣는 한국의 소리’라는 주제로 열린 전시를 보기 위한 사람들이었다. 행사를 준비한 한국 측 관계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현지인이었을 만큼 큰 관심을 받았다. BTS나 블랙핑크 같은 K팝 가수에 대한 관심이 그 뿌리인 조선 악기로 이어진 모습이었다.
5일 중앙과학관에 따르면 4월 초 문을 연 전시가 두 달 만에 관람객 1700여명을 모으는 성과를 냈다. 권석민 국립중앙과학관장은 “한국 전통음악은 단순한 예술을 넘어선 과학”이라며 “중앙과학관 개관 8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런던에서 전통음악을 과학으로 해석하는 해외 전시를 시도했다”고 말했다.
과학관은 우리 전통 악기와 소리의 특징을 수학과 과학으로 분석하고, 서양 악기와 비교해 현지 관람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시를 꾸몄다. 전시에서 현지인들이 가장 관심을 보인 건 한국인에게도 생소한 황종율관이었다. 우리 궁중 음악인 아악의 음계 기준인 ‘황종’을 정확히 낼 수 있는 관을 말한다.
황종율관이 정확하게 만들어져야 이를 바탕으로 악기의 음정을 정확하게 맞출 수 있다. 세종대왕은 박연을 악학별좌에 임명하고 아악을 정비하도록 했는데, 박연이 가장 먼저 한 일이 황종율관을 새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는 악기의 소리를 조율하는 기준이 된 12율관의 모습. 현대 공학의 여러 기법이 율관을 만드는 데 활용됐다./국립중앙과학관
박연은 디지털 장비도 없던 15세기에 어떻게 정확한 음정을 구현할 수 있었을까. 신은경 중앙과학관 한국과학기술사과장은 박연이 현대 공학에서 널리 쓰이는 역엔지니어링과 표준화 기법을 동원했다고 설명했다.
중국에서 유래한 황종율관은 원래 기장 낱알 90개를 일렬로 세우는 식으로 크기를 맞췄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의 기장과 조선의 기장은 낱알 크기가 서로 달랐고, 같은 나라라도 기장 알의 크기가 불규칙해서 일정한 관의 길이를 도출하기 어려웠다.
역엔지니어링은 이미 만들어진 장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추론하고 이를 근거로 설계도를 그리는 공학 기법이다. 박연은 정확한 음정을 내는 기존 악기의 소리를 기준으로 삼아서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새로운 황종율관을 만들었다.
또 박연은 크기가 불규칙한 기장 낱알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기존의 황종율관의 길이를 90등분해 같은 크기의 밀랍 낱알을 만들어 기준으로 삼았다. 현대 공학에서 기본이 된 표준화를 15세기에 구현한 것이다.
황종율관을 기준으로 나머지 음계를 만드는 데에는 수학적 원리를 사용했다. 황종율관 길이의 3분의 1을 잘라내고, 다시 그 길이의 3분의 1을 더하는 것을 반복하는 ‘삼분손익법’을 썼다. 신은경 과장은 “관이나 현의 길이가 3대 2의 비율일 때, 절대 5도 높은 음이 높아지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라며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가 발견한 음악의 수학적 규칙과 같다”고 말했다.
영국 런던에서 열린 '조선의 악기, 과학을 울리다' 전시장에서 현지 관람객들이 한국 전통 악기와 서양 악기의 차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해둔 전시를 보고 있다./국립중앙과학관
현지 관람객들은 태평소, 대금, 가야금, 징 같은 한국의 전통 악기에도 관심을 보였다. . 동양과 서양의 악기는 같은 과학적인 원리를 이용하지만, 소재의 차이로 각자 독특한 음색을 낸다.
예를 들어 대금과 클라리넷의 소리에는 베르누이의 원리가 숨어 있다. 18세기 스위스 과학자 베르누이에 따르면 기체나 액체의 속력이 높을수록 압력이 낮아진다. 갈대나 대나무처럼 유연한 소재로 만든 피리서 또는 리드를 물고 안쪽으로 바람을 불면, 공기가 들어가는 유속 때문에 안쪽의 압력이 낮아지며 리드가 닫힌다. 리드 자체의 탄성 복원력 때문에 리드가 다시 열리는데, 이것이 반복되며 진동을 만들어낸다.
베르누이의 원리 자체는 같지만, 대금과 클라리넷의 음색은 다르다. 차이는 소재에 있다. 대금은 한반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식물인 갈대를 사용해 독특한 떨림과 특유의 음색을 만들기 때문에 서양 관악기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가야금과 바이올린도 마찬가지다. 가야금의 울림통은 오동나무로 만든 앞판과 밤나무로 만든 뒷판을 사용한다. 반면 바이올린은 주로 가문비나무를 앞판으로, 단풍나무를 뒷판으로 사용하는데, 이런 소재의 차이가 음색의 차이로 이어진다.
영국 런던에서 열린 '조선의 악기, 과학을 울리다' 전시장 전경. 국립중앙과학관의 첫 번째 해외 전시다./국립중앙과학관
전시의 마지막은 인공지능(AI) 같은 첨단 기술이 한국 전통 음악과 국악을 어떻게 확장하고 발전시킬지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이번 전시에서는 고등과학원 거대국악데이터 독립연구단과 포스텍 연구팀이 국악의 구조를 수학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AI에 학습시켜 새롭게 작곡한 국악을 선보였다.
헬렌 존스 런던과학박물관 국제협력과장은 “과학관은 흔히 어린이만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런던과학박물관과 국립중앙과학관은 과학이 문화의 한 부분이라는 폭넓은 시각을 공유하고 있다”며 “어른들도 즐길 수 있는 음악의 아름다움에 대한 섬세한 과학 전시를 보게 돼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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