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에 바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경제사령탑 전윤철·윤증현
내수 부진과 통상 전쟁, 성장잠재력 하락이라는 내우외환 위기 속에서 4일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정부 성향이 3년 만에 보수에서 진보로 바뀌면서 경제 정책을 둘러싼 불확실성도 높아졌다. 일각에서는 경제 성장보다는 분배를 앞세운 문재인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처럼 유권자들의 표에 영합하는 포퓰리즘 정책이 반복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본지는 김대중 정부 재정경제부 장관과 노무현 정부 감사원장을 지낸 전윤철 전 부총리, 노무현 정부 금융감독위원장과 이명박 정부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윤증현 전 장관을 4일 만나 새 정부가 직면한 경제 상황과 풀어야 할 과제에 대해 인터뷰했다. 두 전직 경제 사령탑은 진영 논리를 벗어나 새 정부가 외환 위기 이후 최악인 경제를 살리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전윤철 전 경제부총리가 3일 오후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에서 전직 경제관료로서 새정부에 바라는 당부를 하고 있다. 2025. 6. 3/ 조인원 기자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경제부총리와 공정거래위원장, 감사원장 등을 지낸 전윤철 전 부총리는 현재 한국 경제 상황을 “외환 위기 직후 출범한 김대중 정부 이후 최대 혼란기”라고 진단하며 “이념과 정쟁에 물든 규제와 포퓰리즘 정책이 경제를 망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경제 정책만큼은 시장경제 원리를 우선시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전통이 문재인 정부에서 깨졌다”고 지적하며 “새 정부가 이 전통을 복원해야 한다”고 했다.
-이재명 정부가 마주한 경제 상황이 녹록지 않다.
“외환 위기 직후 출범한 김대중 정부 이후 지금 같은 경제 위기가 있었나 싶다. 갖가지 규제와 포퓰리즘 때문에 경제성장률은 멈춰 서 있고, 새로운 주력 산업은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새 대통령이 두 가지를 해결해야 한국 경제가 다시 뛸 텐데, 오히려 포퓰리즘을 강화하려는 모습만 보여 걱정이 크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어땠나.
“두 대통령은 경쟁과 혁신이라는 시장경제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존중했다. 경제가 성장하려면 기업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녀야 하고, 정부는 그 가운데 경쟁과 혁신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에 그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반면 문재인 대통령은 일단 정부에서 돈을 뿌리면 시장이 그에 따라 움직이면서 경제가 커질 것이라고 잘못 판단했다. 정부가 돈을 뿌린다고 소비와 투자가 그만큼 커지지 않는다. 이번 정부는 단호히 ‘포퓰리즘과의 절연’을 선언하고, 건전한 시장 경쟁 질서를 회복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규제·포퓰리즘의 유혹이 없었나.
“두 대통령은 철저한 시장주의자였다. 일례로 노무현 대통령은 영남권의 한 대기업 노조가 임금 인상 파업을 벌였을 때, 그 기업의 평균 임금이 1억원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런 사람들이 투쟁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한탄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을 지지하는 노조라는 세력과 별개로, 시장에서 기업들이 마음껏 뛰놀고 경쟁해야 혁신이 일어나고, 경제가 성장한다는 실용적인 입장을 꾸준히 유지했다.”
-두 대통령은 어떻게 시장경제 원칙을 지킬 수 있었나.
“주변 각료들의 의견을 수시로 듣고, 함께 토론했다. 정부 안에서 토론을 거치면 정책이 정제되고 다듬어진다. 특히 누구에게 어떠한 이익을 주고, 누구에게 손해가 갈지를 ‘선택’해야 하는 경제 정책을 짤 때는 토론이 매우 중요하다. 여러 의견을 듣고 함께 고민한 후에야 국익을 극대화하는 ‘최적의 선택지’가 도출된다. 그래야 기업이든 국민이든 설득을 할 수 있고, 정부와 시장 사이에 신뢰가 생긴다.”
-최근 정부에서는 토론 문화가 사라졌나.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에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대통령이 혼자 떠든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장관들과 장시간 토론을 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다. 국무위원들이 언제부터 대통령을 위한 거수기가 됐나. 차기 정부에서는 반드시 토론 문화를 회복해야 한다.”
-진보·보수 진영 모두 경기 부양을 위한 추가경정예산 편성 필요성엔 공감하고 있다.
“돈을 푸는 게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당장 여윳돈이 없어 기본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구제해주는 건 정부의 기본 책무다. 그러나 재정 투입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인지, 또 재정을 투입하더라도 무차별하게 현금을 살포할 것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정부가 뿌린 현금은 언젠가 거둬들여야 한다. 그러려면 기업들을 옥죄게 되고, 애꿎은 규제만 늘어나게 된다. 그러다가 만약 뿌린 돈을 못 거두면 국가 재정이 위기를 맞게 된다.”
-문재인 정부 때 모든 국민에 대한 재난지원금 지급 논란을 말하는 건가.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들의 소득을 늘려주면 소비가 늘고, 투자가 확대될 것이라 생각했다. 먹고 입을 게 부족한 후진국에서는 소득이 늘면 바로 필요한 물건을 살 테니 가능한 논리다. 그러나 한국 정도 되는 국가에서는 소득이 늘어난다고 바로 소비를 늘리지 않는다. ‘전 국민 25만원 지급’ 등 이재명 대통령이 그간 주장해온 정책들은 어떤가. 누군가 ‘문재인 2기’라고 지적해도 반박하기 어려울 것이다.”
-새 정부 최우선 과제는.
“불황 극복을 위해 재정 투입을 하더라도, 동시에 집중적으로 규제부터 대폭 풀어야 한다. 김대중 정부는 나를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유임하면서 ‘경제 관련 규제는 공정위원장이 총대를 메고 다 풀어보라’고 했다. 나라가 외환 위기로 부침을 겪고 있는데도 규제 완화에 나섰던 것이다. 위기 속에서 살아남은 기업들이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그래서 경제 회복기에 접어들었을 때 경기가 살아나는 속도를 높일 수 있도록 지원해 주자는 취지였다. 불황기야말로 구조 개혁의 적기다.”
☞전윤철
1939년 전남 목포 출생. 김영삼 정부 말기와 김대중 정부 초기에 공정거래위원장을 역임했고, 김대중 정부에서 기획예산처 장관과 청와대 비서실장,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감사원장을 맡았다. 이후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 이사장과 광주비엔날레 이사장, 19대 대선 문재인 캠프 공동선거대책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소재 윤경제연구소에서 윤증현 전 금융감독위원장 및 기획재정부 장관이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5.6.2 /박성원 기자
외환 위기와 글로벌 금융 위기 등 한국 경제의 위기 국면에서 소방수 역할을 했던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현재의 내우외환을 극복하기 위해 ‘기획재정부 해체’ 등 정부 조직 개편 공약을 잠시 미루고 통상 협상과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 시급한 현안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정치의 길과 경제의 길은 따로 있다”며 경제 사령탑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도 했다.
-이재명 정부 경제팀에 해주고 싶은 조언은.
“선거 결과는 국민의 선택이니까 존중돼야 한다. 다만 경제는 이념적으로 접근하면 정말 안 된다. 정치의 길이 따로 있고 경제의 길이 따로 있다. 정치는 언제나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해야 하기 때문에 평등을 중심에 둔다. 그러나 경제는 평등을 중심에 두면 경쟁을 망친다. 경제는 효율에 중심을 두기 때문이다. 어느 정부가 들어서든 대한민국의 유일한 경쟁력이 기업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과거 진보 정부도 기업을 우선시했나.
“노무현 정부 때 왜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했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글로벌 경제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미국과 FTA를 안 할 수 없었다. 진보 진영이 반대했던 이라크 파병도 그렇다. 어떤 것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올바른 길인지 대통령으로서 올바른 판단과 결단을 내려준 것이다. 지향하는 가치가 다르다는 이유로 정치가 경제 운영에 개입하면 정치를 망친다. ‘경제는 정치인이 잠잘 때 성장한다’는 서양 말이 있다. 통치자가 이 길을 터줘야 한다.”
-내수 부진과 관세 전쟁 속에 출범한 새 정부의 과제는.
“실무적으로 인사를 서둘러 대내외 경제 리더십을 확보하는 게 최우선 과제다. 지금 전임 대통령이 탄핵됐고 국무총리와 경제부총리가 사퇴해 교육부 장관이 ‘대대대행’을 맡고 있다. 하루빨리 적임자를 앉혀 리더십을 안정시켜야 한다. 지금은 내우외환의 복합 위기다. 계엄으로 내수 시장이 꽁꽁 얼어붙어 자영업자들이 어렵다. 건설업도 난리다. 또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로 우리나라가 직격탄을 맞았다. 건설업, 자영업자를 살리는 등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추가경정예산 편성도 시급하다. 급한 불을 끄는 단기 과제 수행을 위해 인선을 서둘러야 한다. 이후 노동·교육·의료 등 분야에서 구조 개혁도 이어가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기획재정부 해체 등 정부 조직 개편을 공약했다.
“위기 상황에서는 새로운 일을 벌이기보다 급한 불을 끄는 데 집중해야 한다. 경제 부처는 수차례 합쳐졌다가 쪼개지는 일이 반복돼 왔고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이거 조금 늦는다고 무슨 문제가 생기진 않는다. 전문가들이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올해 말까지 방안을 짜고, 그 전까지는 통상 협상과 추경 편성 등 현안을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기획예산처와 재정경제부(금융정책 제외)가 2008년 2월 기획재정부로 통합됐고, 이듬해 2대 기재부 장관을 맡았다. 정부 조직 개편에 대한 견해는.
“예산을 떼어내 대통령 직속으로 보내는 것은 절대 안 된다. 예산 편성이 정치적 목적으로 휘둘릴 수 있기 때문이다. GDP(국내총생산)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이 50%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재정 건전성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또 세입과 세출 기능이 한 부처 안에 있어야지, 각기 다른 부처에서 맡으면 손발이 맞지 않는다.”
-국내 금융정책과 국제 금융정책·경제정책은 각각 금융위와 기재부가 따로 맡고 있다.
“국내 경제 정책과 금융, 국제 금융을 구분할 실익이 없다. 이걸 또 합치면 비대해진다는 비판이 나오겠지. 하지만 외환 위기를 극복한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이 기능들이 재정경제부라는 한 부처에 있었다.”
-대통령실과 경제팀 관계는 어때야 하나.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은 내각(행정부)이 하도록 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가 제일 잘못한 것은 대통령실이 내각에 ‘이래라저래라’ 한 것이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 되기 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인 1961년 시골 농촌을 찾아 ‘쌀값 좀 올려달라’는 농민 얘기를 듣고 재무 장관을 불렀다. 장관이 대뜸 ‘그럼 도시 서민들이 쌀을 그렇게 비싸게 사는 문제는 어떻게 할 거냐. 재원도 부족하다’고 하자 그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이후 박 의장이 경제기획원을 출범시켰고 권한을 다 줬다.”
☞윤증현
1946년 경남 마산 출생. 재정경제원 금융정책실장 시절인 1997년 터진 외환 위기의 전 과정을 목격하고 대응한 한국 경제사의 산증인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2007년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을 맡았고,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2011년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글로벌 금융 위기 극복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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