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지훈의 뮤지컬 읽기] 서울시뮤지컬단 더>
[안지훈 기자]
1960년대 북한의 극단이 엄청난 쇼를 선보였고, 이에 지지 않으려는 대통령이 우리도 엄청난 쇼를 만들라고 지시한다는 상상에서 뮤지컬 <더 퍼스트 그레잇 쇼>는 출발한다. 시대적 배경은 북한과 체제 경쟁을 하고, 그 중심에 중앙정보부가 있던 시기이다. 대통령은 중앙정보부를 통해 은밀한 방법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고, 곳곳에 태극기와 대통령의 실루엣을 담은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 모든 것은 상상에 기반한 픽션이다. 설령 실제 사건이 연상되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이 공연 초반에 안내된다. 그렇게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 최초의 뮤지컬 제작기가 탄생한다. 이전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쇼, 최초이면서 엄청난 쇼, 즉 '더 퍼스트 그레잇 쇼'가 시작된다.
<더 퍼스트 그레잇 쇼>는 서울시뮤지컬단이 3년을 공들여 만든 창작 뮤지컬이다. 이를 위해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극본상을 수상한 박해림 작가와 음악상을 수상한 최종윤 작곡가가 의기투합했다. 여기에 김동연 연출과 송희진 안무가 등 걸출한 제작자들이 참여했다.
![]() |
▲ 뮤지컬 <더 퍼스트 그레잇 쇼> 공연 사진 |
ⓒ 세종문화회관 |
뮤지컬 초짜들의 좌충우돌 뮤지컬 제작기
북한이 엄청난 쇼를 만들어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통령은 우리도 세계를 놀라게 할 엄청난 작품을 만들라고 중앙정보부에 지시한다.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은 없다. 그저 이전에 선보인 적 없는 새로운 쇼, 그러면서도 위대하고 엄청난 쇼를 만들라는 추상적인 명령만 있을 뿐이다.
임무를 맡은 이는 유덕한 실장으로,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이어 중앙정보부에서 일하지만 능력은 인정받지 못한다. 막중한 임무를 잘 수행하면 그제서야 밥값을 하는 것이고, 만약 실패한다면 유덕한을 내칠 명분이 중앙정보부 상부에 생기는 셈이다. 어딘가 애매하고 조직 내에서 존재감도 없는 유덕한 실장은 배우 박성훈과 이창용이 연기한다.
유덕한 실장이 만들어야 하는 공연은 새롭고 엄청난 쇼이기도 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권력자의 입맛에 맞아야 한다. 그래서 유덕한 실장은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어하고, 대통령의 취미가 무엇인지, 어떤 연예인을 좋아하는지 궁금해한다(넘버 '그분의 마음'). 공연을 만들 연출가를 섭외하는 과정에서 일가친척까지 사상 검증을 하는 건 필수다.
우여곡절 끝에 영입한 김영웅 연출은 그렇다 할 작품을 한 번도 만들어보지 못한 인물이다. 김영웅 연출은 배우 조형균과 이승재가 연기하며, 유덕한과 김영웅을 제외한 모든 배역은 원-캐스트로 진행된다. 김영웅 연출과 호흡을 맞추는 윤지영 작가는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소개하지만, 정작 그도 뮤지컬을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다. 강길룡 작곡가는 재즈를 공부했고, 유덕한 실장이 이곳저곳에서 영입한 배우들은 소리꾼, 사물놀이패, 성악가, 트로트 가수, 무당 등이다.
뮤지컬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이 모였으니 각종 시련을 겪는 것은 당연하다. 뮤지컬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는 어려움도 있고, 활동 분야가 다른 이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오해도 공연 제작을 방해한다. <더 퍼스트 그레잇 쇼>는 이 모든 과정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 |
▲ 뮤지컬 <더 퍼스트 그레잇 쇼> 공연 사진 |
ⓒ 세종문화회관 |
예술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두 가지 힘
공연을 만들기 위해 고려해야 하는 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대통령의 입맛, 다른 하나는 자본의 입맛이다. <더 퍼스트 그레잇 쇼> 자체는 이를 코믹하게 표현하지만, 이런 상황이 제공하는 문제 의식은 생각해봄직하다.
유덕한 실장은 상부가 불만을 표할까 두려워 작품을 검열한다. 연출과 작가는 서른 번도 넘게 대본을 수정한다. 소재는 처음부터 나라를 빛낸 위인들로 삼았고, 이들이 만드는 뮤지컬은 한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애국심을 함양하는 걸 목표로 한다.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국가 권력이 역사적 정체성을 창조하고 강조하며 국가를 강화한다고 보았다. 단절된 과거를 사람들이 '우리의 것'이라 인식하게 하고, 어떤 인물을 추앙하고 어떤 인물을 배척할지 결정한다. 민족의 영웅들을 공연의 소재로 삼아 민족의 우수성과 애국심을 강조하는 건 바로 이런 실천이다.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는 문화가 체제 선전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봄 직하다.
한편 새롭고 엄청난 쇼에 후원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후원자들의 이름이 공연 중에 언급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이 유덕한 실장에게 전해지고, 소위 말하는 PPL의 형식을 빌려 다양한 상품이 광고되기도 한다. 예술이 자본의 영향력 아래 놓일 경우, 예술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 대신 자본 권력이 강조하고자 하는 말을 반복할 공산이 커진다.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는 '문화 산업'이라는 개념으로 위험성을 경고했다. 예술이 자본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현상이 심화될수록 문화적 가치는 사라지고, 문화 예술이 동질화될 가능성이 커지며, 사람들은 무력해진 끝에 권력자들만 웃게 될 것이란 지적이다.
![]() |
▲ 뮤지컬 <더 퍼스트 그레잇 쇼> 공연 사진 |
ⓒ 세종문화회관 |
뮤지컬은 해피엔딩
공연을 만드는 사람들은 공연 자체가 무산될 위험에 처하기도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쇼를 만들고 공연하기까지 여러 어려움이 이들을 기다리지만, "여기가 내 자리"라고 꿋꿋하게 노래하는 모습은 관객들의 박수와 응원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극중 윤지영 작가는 뮤지컬은 반드시 해피엔딩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건 극중 인물들이 공연하는 쇼에 해당될 뿐 아니라 <더 퍼스트 그레잇 쇼> 자체에도 해당된다.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서로의 꿈을 공유하며 이들은 끝내 뮤지컬을 만들어낸다.
<더 퍼스트 그레잇 쇼>는 이해하기 쉬운 서사, 명확한 기승전결 구조가 강점이다. 강렬하고 신나는 음악과 배우들의 쇼맨십도 훌륭하다. 남녀노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여기에 더해 뮤지컬 팬이라면 반가워 할 여러 작품의 멜로디가 조금씩 등장한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지난 5월 29일 개막한 <더 퍼스트 그레잇 쇼>는 다가오는 6월 1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된다.
![]() |
▲ 뮤지컬 <더 퍼스트 그레잇 쇼> 공연사진 |
ⓒ 세종문화회관 |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주 일요일 밤 0시에 랭킹을 초기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