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국 후보, 유연함보다는 원칙주의자적 태도로 유권자들에 신뢰감 줘
진보진영, 득표율 넘어 돌파구 찾기 고심…새로운 활로 열어젖힐까 주목
5월 25일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선후보가 서울 마포구 연남동 경의선 숲길에서 서울 집중 유세를 벌이고 있다. 이준헌 기자
[주간경향] “저는 오늘 이 자리에 혼자 오지 않았습니다.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 싸워온 수많은 목소리를 담아 이 자리에 섰습니다. 노동자, 농민, 자영업자,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그리고 이주민들, 이들이 삶이 더 이상 밀려나서는 안 됩니다.”
지난 5월 18일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는 첫 TV토론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정치적 변화를 강조했다. 상속·증여세 90% 인상, 부유세 신설, 특수고용·프리랜서 노동자의 고용·산재보험 가입 확대 등 선명한 진보 의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국민의힘의 극우화, 민주당의 중도보수 노선 선언 속에 진보의 목소리가 자취를 감춘 이번 대선에서 권 후보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메시지로 주목받았다.
TV토론 한 번으로 사실상 존재감이 없었던 권 후보와 민주노동당은 정치무대 전면에 부상했다. 민주노동당은 2025년 대선을 앞두고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과 민주노총 산하 8개 산별노조, 시민사회단체 등이 함께 결성한 선거연합 정당이다.
첫 토론이 끝난 다음 날, 민주노동당에는 후원금이 쇄도하고 권 후보의 지지율은 뛰었다. 강남규 민주노동당 공보차장은 “TV토론 직후 후원금이 폭증했다. 기존 후원금 최고치였던 후보 기탁금 납부 직전보다 2~3배 이상 늘어난 수준”이라고 말했다. 5월 24일 리얼미터가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권 후보는 지지율은 1.6%를 기록해 직전 조사(0.6%)에 비해 크게 올랐다.
진보정치가 유권자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상황에서, 권 후보가 이번 선거를 통해 의미 있는 득표율을 기록하고, 다시금 진보정치의 존재감을 회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정의당은 2024년 총선에서 정당 득표율 2.14%를 기록하며 창당 12년 만에 원외정당으로 전락했고, 권 후보는 총선 참패 직후인 5월 정의당 대표로 선출됐다.
대중조직과 단절돼 녹록지 않은 환경
권 후보는 기존 정의당 리더들과는 결이 다르다.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 심상정 전 정의당 대표는 한국 진보정당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다.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출발해 진보정당의 창당과 성장에 핵심 역할을 했으며, 국회에서의 입법 활동을 통해 대중운동과 제도정치를 긴밀히 연결했다. 이들은 현실정치의 타협과 연대의 복잡한 지형 속에서 진보적 가치와 유연한 정치력을 바탕으로 진보정치의 외연을 넓혀왔다.
권 후보 또한 세 차례 총선에 출마하긴 했지만 노동·인권 변호사로서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등 제도정치의 공간 밖 투쟁 현장에서 주로 활동해왔다. 한 진보정당 관계자는 “과거 민주노동당이 처음 원내에 진출했을 때, 정치의 속성은 타협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와 운동은 서로 다른 문법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을 체감하게 됐다”라며 “권 후보는 오랜 시간 거리와 투쟁 현장에서 활동해온 인물이다. 정치인이라기보다는 투사에 가까운 캐릭터로, 유연함보다는 일관된 원칙과 태도로 진보정치를 이끌고자 하는 스타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일례로 첫 번째 토론회에서 권 후보가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와 악수하지 않은 점을 들었다.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은 “첫 토론회 준비 과정에서 모든 후보와 악수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권 후보는 잘못을 사과하지 않는 내란 세력과의 악수는 그 자체로 그들을 용인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며 악수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진보정당 관계자는 이를 두고 “정치란 결국 지지층을 넘어 더 넓은 유권자들과의 접점을 만드는 과정인데, 김문수 후보를 지지하는 35%의 유권자들까지 적대적 대상으로 인식될 경우 확장성에 제약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타협이 필요한 현실정치에서 원칙론적인 권 후보의 캐릭터가 외연 확장에 걸림돌로 작동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반면 정의당이 원외정당이 된 지금, 오히려 이런 원칙주의자 같은 태도가 진보 유권자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강남규 차장은 “기성 정치인처럼 유연하지 못한 것이 한계로 비칠 수는 있지만, 위성 정당 논란 등 진보정당들이 정체성을 잃고 흔들리는 시기에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라며 “정의당이 원외가 돼 현장과의 연결을 복원해야 하는 상황에서 권 후보는 과거 민주노동당의 야성을 살릴 적임자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김종대 전 의원은 “유권자들이 가치를 지향하는 데 있어 목마름이 있다. 그 같은 요구가 충분히 반영된 리더십”이라고 했다.
그러나 권 후보가 마주한 대외적 환경은 녹록지 않다. 진보정당 관계자는 “기존 정의당의 문제는 무엇보다 대중조직과의 연계가 사실상 단절된 데 있다. 과거 민주노동당 분열 이후 가장 큰 대중조직인 민주노총 내에서도 노동정치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흐려졌고, 그동안 선거 때마다 내려졌던 선거방침 역시 실효성을 상실했다”라고 말했다. 선거방침은 민주노총이 선거를 앞두고 조합원들에게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는 후보자나 정당을 지지할 것을 공식적으로 권고하는 지침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진보정당이 분열된 이후 민주노총의 선거방침은 조합원들에게 복수의 진보정당 후보 중 한 명을 선택하라는 형식적 권고에 불과했다. 과거 단일 진보정당 체제에서는 조합원들의 진보정당 지지율이 10%를 넘나들 정도로 일반 국민 여론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였지만, 지금은 선거방침이 설득력 있는 정치적 메시지로 작동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광장의 소리 정치 안으로 끌어들일지 관심
심지어 민주노총은 이번 대선에서 사상 처음으로 대선 방침을 내지 않았다. 유일한 진보정당 후보인 권 후보에 대한 공식 지지 방침조차 정하지 않은 것인데, 이는 김재연 진보당 대표가 대선 출마를 포기하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지지를 선언한 데 따른 내부 갈등이 주요하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는 “권 후보가 유일한 진보정당 후보로 나섰음에도 민주노총이 지지 방침조차 내리지 않은 것은 명분도 설득력도 없는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번 대선을 계기로 정의당·녹색당·노동당과 공공운수노조 등 민주노총 산하 8개 산별노조가 참여한 ‘사회대전환 연대회의’는 끊어진 진보정당과 대중조직을 연결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강상구 노회찬정치학교 교장은 “정의당이 지난 총선에서 원외정당으로 밀려나면서 노동·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위기의식이 커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내란과 탄핵 정국을 거쳐 대선까지 이어진 격동의 정치 국면이 사회대전환 연대회의의 출범으로 이어졌다”라며 “비록 과거 민주노동당처럼 큰 규모는 아니지만, 이번 연대는 사회운동과 노동조합 그리고 진보정당들이 다시 손을 맞잡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기존에 단절됐던 흐름과는 분위기가 다르다”라고 말했다. 홍명교 활동가는 민주노총이 이번 대선에서 선거지침을 내리지 않은 결정이 오히려 진보정당과 대중조직 간 능동적인 연대를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과거 민주노총이 복수의 진보정당 후보들을 모두 지지한다는 식으로 방침을 밝혔을 때 기층의 조직이나 산별노조들이 활발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각자 알아서 하는 분위기였다”라며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연대회의에 결합한 8개의 민주노총 산별노조 지역본부들이 굉장히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지지 선언을 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진보정당의 위기 속에서 권 후보는 광장의 목소리를 정치 안으로 끌어들이며 진보정치에 새로운 활로를 열 수 있을까. 강상구 교장은 “내란과 탄핵을 거치며 현장의 목소리가 광장으로 집결했고, 그 목소리가 정치로 흘러 들어가는 통로가 필요하다. 권 후보는 오랜 기간 활동하며 현장의 목소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대변해온 인물로 그 역할에 적임자라 할 수 있다”라고 전했다. 홍명교 활동가는 “이번 선거는 득표율을 넘어 진보진영 내부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공동의 문제의식 속에서 치러지고 있다”라며 “이번 선거의 경험이 긍정적으로 기억돼야 향후 선거에서도 협력과 연대가 지속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권 후보는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투쟁 현장의 최전선에서 꾸준히 싸워온 인물로 진보진영에서 이미 신뢰가 형성돼 있다”라고 말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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