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계 논란 재점화되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원자력 산업 기반 활성화를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제공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원자력 발전 확대를 위해 방사선 안전기준을 완화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방사선 노출의 안전 기준에 대한 과학적 논쟁이 다시 불붙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조치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기존 안전 모델을 전면 재검토하고 원전 인허가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어 산업계 환영과 학계 우려가 동시에 나온다.
30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따르면 23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신규 원전 건설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4건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전력 부족을 막고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하는 데 필요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이번 행정명령에는 국유지에 원전 건설을 허용하고 미국 내 우라늄 채굴을 확대하는 내용과 함께 방사선 피폭 허용치를 결정하는 NRC의 기술적 기준을 재검토하라는 지시가 포함됐다. 방사선은 암을 비롯한 여러 건강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또 NRC 조직을 축소·개편하고 신규 원전 승인 신청에 대해 18개월 내 최종 결정을 내리도록 의무화하겠다고 밝혔다. 기존 원전의 운영 연장 신청에 대해서는 12개월 내에 판단하도록 할 방침이다.
특히 18개월 이내에 “과학 기반의 새로운 방사선 기준”을 마련하라고 NRC에 명령했다. 행정명령에는 “NRC는 방사선의 건강 위험을 평가하는 데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선형 무역치 모델(LNT 모델)' 모델과 ‘실현 가능한 한 최소한(as low as reasonably achievable)’이라는 기준의 사용을 재고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향후 NRC는 환경보호청(EPA), 에너지부, 국방부와 협력해 새로운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일반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공식 절차가 포함될 예정이다. 새로운 규칙이 1954년 원자력법의 “생명과 재산의 위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조항 위반을 위반할 경우 법적 분쟁에 부딪칠 가능성이 전망된다.
앞서 일부 원전 지지자들은 NRC의 안전 기준이 과도하게 엄격하고 비용 부담이 커서 원전 개발에 장벽이 되고 있다고 비판해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현재의 모델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고 비합리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며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수준 이하의 방사선까지 원전이 방호하도록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과도한 위험 회피는 안전하고 풍부한 원자력 에너지의 효율적 활용을 방해하며 심각한 국내외적 비용을 유발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는 NRC가 신규 원전 승인을 막는 장애물로 전락했다고 보고 있다. 1975년 핵안전 감독을 위해 설립된 NRC는 1978년 이후 신규 원전 5기만을 승인했다. 실제로 건설된 것은 조지아주의 보글 발전소 3호기와 4호기 두 기뿐이다. 이전 26년간 미국은 133기의 원전을 건설했다. 현재 미국에는 28개 주 54개 상업용 발전소에서 94기의 원전이 가동 중이다. 이들 원전은 미국 전력 생산량의 약 19%를 차지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조치는 방사선의 위험성을 둘러싼 수십 년간의 과학적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특히 소량의 방사선이 오히려 건강에 이로울 수 있다는 이른바 ‘호메시스 이론'에 대한 논란도 재점화될 전망이다.
현행 방사선 안전 기준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생존자 8만6600명을 대상으로 한 역학조사 결과에 근거한다. 앞서 학계는 방사선 피폭량이 증가할수록 암 발병률도 직선적으로 증가함을 확인했다. 이를 근거로 방사선에는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임계값’이 없다는 ‘선형 무역치 모델(LNT)’을 도출했다. 이 모델은 방사선 피폭을 가능한 한 최소화해야 한다는 NRC의 규제 기준을 뒷받침한다.
일부 과학자들은 LNT 모델이 과도하다고 지적한다. 세포·동물 실험과 일부 역학 연구를 검토했을 때 일정 수준 이하의 방사선은 해롭지 않으며 오히려 면역 기능을 활성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바로 호메시스 이론이다. 2015년 과학자 단체 ‘정확한 방사선 정보 과학자 모임’은 호메시스 이론을 근거로 NRC에 방사선 허용치를 상향 조정해달라는 청원을 제출한 바 있다. 이들은 “방사선 공포로 인한 사망 예방”을 주요 목표로 내세운다.
NRC는 2021년 이들의 청원을 기각했다. 저선량 방사선에 대한 위험 수준이 명확하지 않으며 호메시스 이론은 과학 문헌에서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NRC는 미국 국립과학·공학·의학아카데미(NASEM)가 2005년 발표한 보고서를 인용하며 “LNT 모델은 여전히 불필요한 방사선 노출을 줄이기 위한 합리적인 규제 기준”이라고 밝혔다.
원자력 산업계는 이번 조치를 반기고 있다. 마리아 코스닉 원자력에너지협회(NEI) 대표는 백악관 행사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했다. 우라늄 채굴 기업 우르에너지(Ur-Energy)도 “미국이 원자력 리더십을 되찾기 위한 과감한 조치”라며 환영했다.
일부 환경단체 역시 긍정적인 평가를 내놨다. 아담 스타인 브레이크스루 연구소 원자력 프로그램 디렉터는 “LNT 모델과 현행 규제를 재검토하겠다는 이번 조치는 NRC의 지나치게 보수적인 문화와 구조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학계에선 우려가 제기된다. 스티븐 본디 미국 캘리포니아대 어바인캠퍼스(UCI) 교수는 “이 조치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방사선 안전기준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라며 “건강보다 경제와 산업을 우선시하는 명백한 조치”라고 비판했다. 그는 2023년 발표한 리뷰 논문에서 “호메시스 이론은 아직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박정연 기자 hes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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