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산란계와는 무관한 자료 사진. [헤럴드DB]
[헤럴드경제=최은지 기자] “달걀로 사람이 맞는 독감 백신을 만든다고?”
조류 인플루엔자가 유행하거나 달걀 수요에 영향을 미치는 국제 정세 등 변화가 생기면 직격탄을 맞는 농가나 정부 관계 부처가 비상에 걸린다.
그런데 의외의 회사들도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사태를 예의주시한다. 유정란 생산 방식으로 독감 백신을 만드는 백신 회사들이다. 제약·바이오 업계는 최근 마리당 사육면적을 확대하는 축산법 시행령에 난감해하고 있다.
닭장 크기가 커지니 그 여파로 백신 제조비용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독감 백신은 바이러스 배양 방식에 따라 제조 방식을 나눈다.
전통적으로 달걀에 바이러스를 넣어 배양하는 ‘유정란 생산 방식’을 이용해 왔다. 독성을 없앤 바이러스를 유정란에서 배양한 후 증식한 바이러스를 추출해 독감 백신으로 만든다.
이는 전 세계 독감 백신의 약 85%를 차지하는 전통적인 생산 방식으로, 오랜 데이터가 축적돼 안전성을 확보했다. 또 상대적으로 저렴한 원가로 생산이 가능하다. 국내에서는 GC녹십자가 유정란 방식으로 독감 백신을 제조·생산하고 있다.
이와 달리 동물세포에 바이러스를 주입해 키우는 ‘세포배양 방식’으로 제조한 독감 백신이 있다. 동물 세포에서 유래한 종균을 포유류 세포에서 배양한 후, 세포 배양액 내의 바이러스를 채취해 항원을 정제하고 불활성화하는 원리다.
무균 배양기를 통해 생산하기 때문에 항생제나 보존제를 투여할 필요가 없어 과민 반응의 우려가 낮다. 달걀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에게도 접종이 가능한 장점이 있다. 대표적으로 SK바이오사이언스가 세포배양 방식으로 독감 백신을 제조·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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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란 백신은 유정란 수급 상황에 따라 영향을 미친다. 사람 몸에 주입하는 백신을 만드는 만큼 유정란의 상태를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유정란은 엄격한 관리가 필수적이다. 유정란 상태에 따라 백신 품질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GC녹십자는 백신 유정란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직접 전용 농장을 지었다. 2011년 설립된 백신 산란계 전용시설 ‘인백팜 화순농장’이다. 이곳은 무균시설로 지어졌고, 항생제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매달 산란계의 피검사 등 건강검진을 실시하고, 특수사료를 지급한다. 백신 유정란은 24주령~60주령의 닭이 낳은 달걀만 사용하는 것이 철칙이다. 이곳에서 하루 10만~15만개의 유정란을 GC녹십자에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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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렇다 보니 ‘닭장 규제’가 독감 백신 가격과 생산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2018년 축산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종계(씨닭)·산란계 농장은 오는 2027년 8월31일까지 마리당 사육면적을 기존 0.05㎡에서 0.075㎡로 확대해야 한다. 이는 2017년 피프로닐 등 살충제에 오염된 달걀이 유통된 이른바 ‘살충제 계란 파동’ 이후 마련된 규제다.
시행령에 따르면 백신 산란계 농장도 사육면적을 확대하기 위해 케이지당 산란계의 수를 줄이거나, 시설을 증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농가별로 케이지의 규격이 저마다 다르지만, 현재 케이지당 8마리의 산란계를 기르는 농장을 예로 들면, 시행령 적용시 케이지당 5마리만 넣을 수 있다.
업계에 따르면 인백팜의 경우 현재 연간 1600만개의 유정란 생산량이 시행령 이후에는 8800만개~1120만개로 최소 30%, 최대 45%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되면 백신 원료 생산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국가예방접종사업(NIP)에 포함된 독감백신의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는 타 양계장에서 수급해야하는데, 이 경우 불량률이 높아질 우려가 나온다.
2024~2025절기 독감백신 조달계약에 따르면 입찰에 참여한 6곳의 업체 중 SK바이오사이언스와 사노피를 제외한 4곳이 모두 GC녹십자 유정란 원액으로 제조·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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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독감백신 물량뿐만 아니라 전 세계 독감 백신 시장에서의 경쟁력 약화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GC녹십자 독감 백신은 주로 국제기구 입찰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GC녹십자는 세계보건기구(WHO), 범미보건기구(PAHO) 남반구 독감백신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와의 경쟁에서 1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가격 경쟁력이다.
업계에서는 육계와 마찬가지로 백신 산란계도 예외 규정을 두어 사육장 시설면적을 현행 유지하는 방안이 현실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생산시설 증축에 따른 예산과 세제 감면 혜택 등도 고려할 사항이다.
업계 관계자는 “축산법 시행령에 따라 마리당 사육면적을 확대할 경우 백신 단가 인상은 불가피하고, 결국 수출 경쟁력 악화로 이어질 것”이라며 “원료의약품 불균형에 따른 품절 위험도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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