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자산 제도 마련 시급
지난해 국내 한 금융 플랫폼은 ‘가상 자산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상장을 추진한 적이 있다. 비트코인·이더리움 같은 가상 화폐 등의 가격을 기초로 지수를 만들어 일반인들이 주식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국내 자본시장법은 가상 자산을 ETF 같은 금융 상품의 기초 자산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핀테크 업계 관계자는 “한국에선 가상 자산을 어떻게 간주해야 할지에 제도적으로 합의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픽=이철원
가상 화폐 거래액은 1345조원(작년 말 기준)으로 주식 시장인 코스피 거래액(1214조원)을 넘어섰다. 이용자도 970만명에 이른다. 이번 대선에서 여야 후보들도 ‘가상 자산 현물 ETF’ 도입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하지만 가상 자산 산업 전반을 규정하는 기본법이 없어 이용자 보호와 관련 산업 육성, 과세 등이 적절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이철원
◇코스피보다 큰 시장, 기본법은 無
국내에서 가상 화폐 거래소가 처음 생긴 건 2013년이다. 그러나 10년이 넘도록 가상 자산을 하나의 ‘산업’으로 규정하는 기본법은 마련되지 않았다. 기본법을 통해 시장을 제도권 안으로 편입시켜 정부가 책임 있게 규제하고, 산업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틀’을 갖춰야 하는데,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상황이다.
현재 디지털 자산 사업자에 대한 규제는 2001년 제정된 자금세탁방지법인 ‘특정금융정보법’에 의존하고 있다. 2023년 7월 시행된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은 예치금 확보와 자금세탁방지책(트래블룰) 등 개인 투자자 보호 조치에 한정돼 있다. 국내 가상 화폐 거래소 관계자는 “기본법이 없다 보니 정부의 행정 지도마저 법적 근거 없이 이뤄지고, 제재의 기준과 대상, 범위, 해석에 대한 논란이 매번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기본법 없이는 국제 표준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인 예가 가상 자산 현물 ETF다. 작년 1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비트코인 ETF 발행을 허용했고, 유럽연합(EU)은 이에 앞서 가상 자산 관련 파생 상품들을 허용하고 있다.
일본도 가상 자산을 제도권으로 편입하기 위해 법을 정비하고 있다. 아직 기본법을 마련하지 못했지만, 2019년에는 ‘금융상품거래법’을 개정해 가상 자산 파생 상품을 규제 대상에 포함시키는 등 가상 자산 관련 체계를 정비했다. 내년부터 가상 자산 ETF를 시작하기 위한 법 개정 작업에도 착수했다.
반면 국내 자본시장법에선 가상 자산을 기초 자산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금융 당국에선 이를 이유로 가상 자산 현물 ETF 발행을 승인해주지 않고 있다. 한국재무관리학회장을 지낸 강형구 한양대 교수는 “가상 자산 현물 ETF 승인이 늦어지면서 가상 자산 시장을 활성화할 기회를 놓치고 있다”며 “우리나라 금융 당국은 법인이 가상 자산에 투자하는 걸 막고 있는데, 기본법이 없다 보니 명확한 법적 근거 없이 제재를 하는 ‘그림자 규제’가 되고 있다”고 했다.
◇불확실성 큰 과세도 우려
과세 문제 역시 국내 가상 자산 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문제로 꼽힌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을 매긴다는 과세 원칙에도 불구하고, 과세 기준과 방식이 불명확한 상황에서 시행 시기만 계속 늦춰지고 있다. 실제로 가상 자산 과세는 당초 2022년 도입될 예정이었지만, 세 차례나 연기된 끝에 2027년 1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과세 시스템 전반이 여전히 정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외 거래소에서 발생한 소득을 어떻게 산정할지, 거래 내역은 어떤 방식으로 신고할지, 취득 원가는 어떤 기준으로 정할지 등 핵심 쟁점이 제대로 논의되지 않은 상태다. 안성희 가톨릭대 회계학과 교수는 ‘디지털 자산 과세 제도 현안 토론회’에서 “현재 취득 원가 산정 기준이 모호해 세원이 투명하지 않고, 결국 국내 디지털 자산 거래소 이용자가 해외로 떠나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내국인이 해외 가상 자산 거래소를 이용할 경우 금융 당국 입장에서 취득 원가나 소득 산정이 더 어렵다. 한국 세무 당국이 무작정 과세를 할 경우엔 국내 거래소 이용자가 해외 거래소로 이탈해 국내 가상 자산 산업 경쟁력만 크게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기본법
특정 분야나 영역에서 전반적인 방향성과 원칙을 정하고, 그에 따라 개별 법률이나 제도가 마련될 수 있도록 기준을 제시하는 법률. 국가가 해당 분야를 어떻게 바라보고 관리할 것인지 드러내는 정책적 선언의 성격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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