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트넘의 손흥민이 22일(한국시간) 스페인 빌바오의 산 마메스 경기장에서 열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2024~25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UEL) 결승전에서 승리한 뒤 우승 트로피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빌바오=로이터 연합뉴스
'빵빵 빵빵빵, 빵빵빵빵 빵빵!~'
23일 새벽(현지시간) 스페인 빌바오의 중심가를 달리던 한 대형버스에서 경적이 울려 퍼졌다. 불과 몇 시간 전 2024~25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UEL) 결승전을 마친 토트넘 홋스퍼 선수단이 탄 버스였다. 숙소로 이동하던 중 토트넘의 캡틴 손흥민(33)이 보조석에 앉아 신나게 경적을 울려댔다. 한국 축구대표팀을 응원할 때 들었을 박자에 맞춰 경적을 울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한국 사람'이었다.
늦은 시간에도 거리에서 토트넘 유니폼을 입은 팬들을 본 손흥민은 경적으로 인사하며 반갑게 소리쳤다. 손흥민을 알아 본 팬들은 놀라면서도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경기는 끝이 났지만 우승의 여운은 가시지 않은 듯했다. 그러곤 뒷자리에 앉아 있는 동료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 2분 남았어, 동지들!"
손흥민은 드디어 꿈을 이뤘다. 경기장에서 호텔까지 그 짧은 순간에도 꿈을 깨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몇 해 전 "토트넘에서 우승 트로피가 없으면 진정한 레전드가 아니다"라 했던 자신의 말을 뒤엎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결국 손흥민 자신을 진정한 레전드로 만들었다. 이제 손흥민이 첫 우승컵을 들어 올린 날은 한국을 넘어 세계 축구사에 기록될 '사건'임에 틀림없다. 손흥민의 꿈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순간을 '이달의 스포츠 핫피플'에서 짚어봤다.
토트넘의 손흥민이 22일(한국시간) 스페인 빌바오의 산 마메스 경기장에서 열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2024~25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UEL) 결승전에서 승리한 뒤 우승 트로피를 들고 동료들과 기뻐하고 있다. 빌바오=AP 연합뉴스
손흥민은 22일(한국시간) 스페인 빌바오의 산 마메스 경기장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와의 UEL 결승전을 1-0 승리로 마친 뒤 그대로 그라운드에 무릎을 꿇고 포효했다. 소리치는 그의 눈에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드필더 로드리고 벤탕쿠르가 달려와 손흥민의 얼굴을 움켜잡고 "쏘니, 넌 우승할 자격이 충분해!"라며 15년 무관 탈출을 축하해줬다.
손흥민은 이날 선발 출전이 아닌 벤치 멤버로 출발했다. 영국 현지 언론들은 손흥민의 선발 출전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며 "교체 명단에 넣어야 한다"고 윽박질렀다. 그러면서 2018~19시즌 UEFA 유럽챔피언스리그(UCL) 결승전 당시를 끄집어냈다. 당시 해리 케인(바이에른 뮌헨)의 부상 결장 속에 손흥민을 비롯한 루카스 모우라, 델레 알리, 크리스티안 에릭센 등은 기적 같은 순간을 만들며 리버풀(잉글랜드)과의 결승전까지 도달시켰다. 그러나 당시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토트넘 감독은 부상에서 돌아온 케인을 모우라 대신 결승전에 선발 출전시켰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토트넘이 준우승에 머문 패착으로 해석되는 부분이다.
영국 BBC 방송은 이를 놓치지 않고 저격했다. BBC는 "손흥민이 부상에서 복귀한 가운데 UEL 결승전에 필요한 경기력, 투쟁심 등을 갖추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며 "2018~19시즌 UCL 8강전에서 발목 부상을 입었다가 결승전에 나온 케인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상기시켰다. 손흥민이 2019년 6월 2일 2018~19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 결승전에서 리버풀에 패한 뒤 준우승 메달을 목에 걸고 트로피를 지나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손흥민은 이날 교체 출전했지만, 이것이 그와 토트넘의 역사를 저지하지 못했다. 경기 직후 포효하던 손흥민의 머릿속엔 6년 전 UCL 결승전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무기력하게 0-2로 패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그였다. 구단 사상 첫 UCL 결승에 진출해 우승까지 바랐던 27세 청년은 어느새 팀의 베테랑 선수가 됐고, 뒤에서 팀을 밀어주는 주장으로서 마침내 UEL 승리를 맛봤으니 말이다.
경기 직후 TNT 방송과 인터뷰에서 진행자는 '이제 레전드라고 불러도 되지 않겠나'라며 물었고, 그제서야 손흥민은 웃으며 "그렇다. 오늘만큼은 레전드라고 하겠다"며 활짝 웃었다. 매일 밤 이날 경기에 대한 꿈을 꿨다며 "꿈이 현실이 됐고 이루어졌다. 오늘 밤은 마음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다"고도 했다.
UCL 트로피(빅 이어)와 달리 손잡이도 없이 15㎏이나 되는 트로피는 이날 손흥민의 차지였다. 시상대에서 주장이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우승 세리머니부터 시작해 그라운드, 라커룸에 이어 심지어 이동하는 버스와 비행기에서 손흥민은 트로피를 꽉 안고 있었다. 우승 세리머니를 하다 트로피에 이마를 찧어 다쳤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토트넘의 손흥민이 22일(한국시간) 스페인 빌바오의 산 마메스 경기장에서 열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2024~25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UEL) 결승전에서 승리한 뒤 포효하고 있다. 빌바오=로이터 연합뉴스
손흥민은 지난 10년간 EPL에서 한국 선수로는 최초의 기록들을 써 왔다. UEL 결승전이 끝나고 시상대에서도 그는 토트넘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 선수가 주장을 맡아 우승하고,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새 역사도 기록했다.
축구 변방으로 불리는 아시아 국가에서 세계 축구계를 이끌고 있는 EPL의 축구스타가 되기까지 손흥민도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그는 국내 중계 방송사와 인터뷰에서 한국 관련 질문에 금방 입을 떼지 못하다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아시아선수로서 겪었을 고난과 역경이 고스란히 드리웠다.
그는 EPL에서 경이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손흥민은 23일 현재 EPL 역대 득점 순위에서 공동 16위(127골)에 올라 있다. 2015년 토트넘에 입성한 이후 현재까지 EPL 현역 선수 중 유일하게 '9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 기록도 갖고 있다. 손흥민은 오는 26일 브라이턴과 EPL 38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한 골만 더 추가하면 또 한번 팀 역사를 다시 쓴다. 토트넘 유니폼을 입고 공식전에서 173골을 넣은 그는, 한 골만 터져도 구단 레전드 마틴 치버스(174골)와 함께 득점 공동 4위에 오를 수 있다. 스스로 레전드의 역사를 쓰고 있는 셈이다.토트넘의 손흥민(가운데)이 22일(한국시간) 스페인 빌바오의 산 마메스 경기장에서 열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2024~25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UEL) 결승전에서 승리한 뒤 우승 트로피를 들고 동료들과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빌바오=로이터 연합뉴스
우승 없이 토트넘에 머문 그는 개인적 업적을 많이 쌓았다. 2021~22시즌 EPL에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공동 득점왕(23골)에 올랐고, 2016~17시즌 잉글랜드축구협회(FA)컵에서도 아시아 선수 최초의 공동 득점왕(6골)을 기록했다. 2019~20시즌 국제축구연맹(FIFA) 푸슈카시상을 비롯해 같은 시즌 잉글랜드선수협회(PFA)가 선정한 '올해의 팀'에 아시아 선수 최초로 뽑히는 등 당분간 아시아 선수가 뛰어넘기 쉽지 않을 역사를 기록 중이다.
2008년 독일 함부르크 유소년팀에 들어가 2010~11시즌부터 1군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손흥민의 나이는 고작 18세였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독일전에 골을 넣었던 당시를 떠올리며 "어릴 때 독일에서 상상도 못할 힘든 생활을 했고, 인종차별도 많이 당했다"며 "언젠가는 꼭 갚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그래서 미련없이 독일을 떠나 영국 무대로 옮겼으나 이 또한 녹록지 않았다. 23세의 손흥민은 주전 경쟁에서 밀리는 것도 모자라 현지 언론의 비판까지 들어야 했다. 2018~19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에서 활약한 토트넘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과 손흥민. 로이터 연합뉴스
그때마다 손흥민에겐 '은인'이 등장했다. 뤼트 판 니스텔로이(48) 현 레스터 시티 감독을 만난 것도 힘들었다는 함부르크 시절이다. 판 니스텔로이 감독은 당시 손흥민이 함부르크 1군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멘토 역할을 자처했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손흥민은) 마치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며 자신은 경험하지 못한 선배의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올초 토트넘과 레스터 시티 경기 직전 손흥민이 판 니스텔로이 감독에게 달려가 인사하는 장면은 축구팬들을 흐뭇하게 했다.
토트넘에서 적응하지 못해 다시 독일로 돌아가려 했던 순간 포체티노 현 미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붙잡았다. 포체티노 감독은 손흥민을 눈여겨보고 토트넘으로 영입한 뒤 세계적인 공격수로 성장시켰다. 다만 입단 초기에 성과를 내지 못하고 방황할 때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라는 한국말로 위로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손흥민은 포체티노 감독이 경질됐을 때 "나를 토트넘에 영입하고 핵심 선수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다"며 "아직까지 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엔제 포스테코글루 토트넘 감독이 9일(한국시간) 노르웨이 보되 아스프미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4~25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UEL) 준결승 2차전에서 보되/글림트를 꺾고 결승 진출을 확정한 후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보되=AP 뉴시스
2024~25시즌은 손흥민에게 최악의 시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흥민은 토트넘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EPL 10위권 밖을 경험한 적이 없다. 하지만 올 시즌은 1992년 EPL 출범 이후 구단 사상 최저 순위이자, 잔류 마지노선인 17위(승점 38·11승 5무 21패)에 그치며 '폭망' '최악' 수식어를 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손흥민은 시즌 말미 여러 악재가 겹쳤다. 지난달 11일 프랑크푸르트(독일)와 UEL 8강 1차전에서 발을 다쳐 한 달 넘게 결장했다. 공식전 7경기에 나서지 못하면서 실전 감각도 떨어졌다. 지난 11일 크리스털 팰리스전에 후반 교체 투입돼 복귀한 뒤, 17일 애스턴 빌라전에서야 선발 출전했다. UEL 토너먼트도 제대로 뛰지 못했다.한국 축구대표팀 주장 손흥민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주장하며 손씨에게 돈을 뜯어내려 한 20대 여성 양모(왼쪽)씨와 40대 남성 용모씨가 17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와중에 손흥민은 '임신 협박' 논란으로 또다시 사회적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초 카타르 아시안컵 당시엔 이강인(파리 생제르맹)과 물리적 충돌을 일으킨 것이 알려져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선수로서 제 기량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연이은 구설로 따가운 시선도 받았다. 국내에선 '부상이 아닌 사생활 문제 때문에 경기에 나서지 못한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손흥민의 첫 우승은 순조로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힘들 때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맞았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손흥민에게 약속을 지켰다. 그는 "나는 손흥민에게 이런 날을 선사하고 싶었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며 "라커룸 밖, 복도에는 우승팀 사진들이 걸려 있다. 나는 그에게 '우리가 너를 그 자리로 데려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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