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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의 스포츠 인사이드] 거인의 진격 이끄는 박세웅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기세가 심상찮다. 지난해 7위에 그쳤던 롯데는 정규시즌 3분의 1 가량 지난 23일 현재 3위(29승20패3무)를 달리고 있다. 선두 LG 트윈스와는 3경기 차다. 2017년 이후 8년 만의 가을야구는 물론이고, 1992년 이후 33년 만의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꿈꾸고 있다.
롯데는 2023년 10월 ‘우승 청부사’ 김태형 감독을 모셔왔다. 김 감독은 두산 베어스를 이끌고 7년 연속(2015~21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3회 우승을 달성했다. ‘곰탈여우’(곰의 탈을 쓴 여우)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선수들을 장악하고 팀을 하나로 만들어 성과를 내는 데 탁월한 리더다. 그는 취임식에서 “내 임기인 3년 내 한국시리즈 우승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젊고 힘 넘치는 야수 ‘윤나고황’ 포진
22일 부산 사직야구장 롯데와 LG 경기. 팬들이 롯데의 선전에 열광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는 김 감독의 ‘우승 DNA’를 롯데에 심고, 유망주를 발굴하는 과정이었다. 가을야구는 하지 못했지만 팀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고 젊은 야수 ‘윤나고황(윤동희·나승엽·고승민·황성빈)’이 주전으로 자리를 잡았다. 올해는 이들이 공격과 수비에서 한 단계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투수 쪽에서도 정현수·송재영 등 중간계투진과 마무리 김원중이 안정감을 찾았다.
여기에 ‘신의 한 수’가 나왔다. 김 감독이 두산 시절 키운 유격수 전민재와 투수 정철원의 영입이다. 전민재는 견고한 수비는 물론 KBO리그 타격 1위에 오를 만큼 빼어난 공격력으로 단숨에 스타가 됐다. 정철원은 리드를 지켜내는 홀드(11개) 기록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롯데 불펜진에 큰 힘이 되고 있다.
롯데 돌풍은 ‘토종 에이스’ 박세웅(30)을 빼고는 설명이 어렵다. 지난해 6승(11패)에 그쳤던 박세웅은 개막전 패배 이후 9경기에서 8승을 거두며 코디 폰세(한화 이글스)와 함께 다승 공동 1위에 올라 있다. 현재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자신의 커리어 하이(2017년 12승)를 깨는 건 물론, 꿈의 20승 고지를 밟을 가능성도 크다. 20승을 한다면 롯데 선수로서는 최동원(1985년) 이후 40년 만이고, 국내 우완 투수로는 정민태(1999년) 이후 26년 만이 된다.
박세웅은 롯데 레전드인 ‘안경 에이스’의 계보를 잇는 투수다. 롯데는 프로야구 43년 역사상 딱 두 번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는데 그 때마다 안경 에이스의 역투가 있었다.
1984년 최동원(작고)이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5경기에 등판해 4승을 혼자 따내며 첫 우승(4승3패)을 이끌었다. 지금으로서는 있을 수도 없는 혹사였지만 당시 강병철 감독은 밀어붙였고, 최동원도 묵묵히 마운드에 올랐다. 최동원과 ‘영혼의 배터리’였던 포수 한문연은 “7차전 끝나고 숙소에 와서 옷 갈아입고 축승회 가려고 하는데 형님이 ‘내 죽을 것 같다. 니 먼저 가라’ 하고 침대에 푹 쓰러지더라”고 회고했다. 최동원의 모친 김정자 여사는 “동원이는 지 몸을 아낀 적이 없었어요. 던지고 또 던지고, 코피가 터져도 팀이 원하면 던졌지요. 가고 나서 팬들의 사랑을 더 많이 받게 되니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고 말했다.
롯데
최동원의 등번호 11번은 영구결번으로 지정됐고, 사직구장 입구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2014년에는 최동원기념사업회가 KBO리그 최고 투수에게 주는 최동원상을 제정했다. BNK부산은행이 후원하는 최동원상은 연륜을 더해가면서 ‘한국의 사이영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2018년부터는 ‘고교 최동원상’도 시상하고 있다.
1992년 롯데의 두 번째 우승 당시에는 염종석이 있었다. 부산고를 졸업하고 롯데에 입단한 염종석은 192㎝의 큰 키에서 내리꽂는 직구와 예리한 슬라이더로 17승을 거두며 신인왕에 올랐다. 정규리그 3위 롯데는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해태와의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염종석은 두 팀을 상대로 3승1세이브를 올렸고, 한국시리즈 4차전 승리투수가 됐다. 롯데는 정규리그 1위 빙그레 이글스를 4승1패로 꺾고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최동원 정도는 아니지만 염종석도 혹사에 시달렸다. 당시 에이스 투수는 선발 마무리를 가릴 것 없이 등판하거나 등판 준비를 해야 했다. 공교롭게 92년 롯데 감독도 84년 최동원과 함께 우승을 일궜던 강병철이었다. 데뷔 시즌 혹사로 어깨 부상에 시달린 염종석은 100승을 달성하지 못한 채 93승133패의 성적을 남기고 롯데 유니폼을 벗었다. 최동원과 선동열(해태)의 연장 15회 혈투(1987년 5월 16일, 2-2 무승부)를 다룬 영화 ‘퍼펙트 게임(2011)’에서 최동원(조승우 분)의 흉측한 어깨수술 흉터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최동원은 그런 수술자국이 없고, 염종석의 흉터를 본 영화감독이 그 장면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부산 동의과학대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롯데 경기 해설도 하는 염 감독을 전화로 인터뷰했다. 그는 “올해는 봄데(봄에만 잘하는 롯데)를 넘어 여름데, 가을데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선수단의 뎁스(선수층)가 두터워져 주전이 슬럼프나 부상으로 빠져도 다른 선수들이 공백을 잘 메워준다. 선수단 분위기도 좋고 자신감이 넘친다. 정규리그 최소 3위를 하면 한국시리즈도 노려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롯데는 전민재의 부상 공백을 이호준이 잘 메워줬고, 1번 타자 황성빈이 손가락 골절로 빠져 있는데도 장두성이 공·수에서 빼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다.
염 감독은 박세웅에 대해서 “토종 에이스로서 책임감이 커졌고 마운드에서 경기 운영 능력도 좋아졌다. 예전에는 일정하고 단조로운 템포로 공을 던졌는데, 요즘은 중간 중간 견제도 하면서 타자의 리듬을 뺏는 게 눈에 띈다”고 분석했다. 염 감독은 롯데 투수코치 당시 박세웅을 조련하면서 “체중을 늘려야 공의 힘이 살아난다”며 매일 밤 치킨 한 마리씩 먹게 했다고 한다.
박, 류현진과 맞대결서 한화 징크스 날려
박세웅은 최근 인터뷰에서 “직구의 수직 무브먼트가 좋아졌다. 타자 입장에선 공이 솟구쳐서 오는 느낌이 들어 직구 헛스윙 비율이 늘어났다. 또 릴리스 포인트(공 놓는 지점)도 조금 올라가 공의 위력이 더욱 살아났다”고 말했다.
멘탈 요소도 있다. 박세웅은 호투하다가도 동료가 실책을 하면 얼굴이 벌게지며 페이스가 무너지곤 했다. 지난해 5월 28일 대전 한화전에서 박세웅은 10실점을 하고 5회 마운드를 내려갔다. 한화에 워낙 약했던 그는 2023 시즌엔 대전에서 한 번도 등판하지 않았다. 김태형 감독은 다음날 “한 150구 던지게 하려고 했다. 본인이 대전구장에서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말이 안 된다. 앞으로 대전에 맞춰서 계속 올려버릴 것이다”라고 박세웅을 직격했다. 자신이 없다고 도망가는 나약한 멘탈을 깨 버리려고 작심 발언을 한 것이다.
박세웅은 올해 4월 24일 류현진과의 선발 맞대결에서 지긋지긋한 한화 징크스(통산 1승10패)를 털어버리고 3년(1100일)만에 한화전 승리를 맛봤다. 그는 “감독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계속해서 알아가고 있다. 공격적인 투구를 강조하면서 가끔은 다그치는 말씀도 하신다. 혼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감독님 의도를 확실하게 말해주고 싶을 때 그렇게 하신다”고 말했다.
최동원기념사업회 강진수 사무총장은 “최동원상이 12년째를 맞았지만 아직 롯데 소속 선수가 받은 적이 없다. 올해는 박세웅이 20승 이상 올려 팀을 한국시리즈에 진출시키고 최동원상도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안경 에이스’의 귀환을 고대하며 희망고문을 견뎌온 모든 롯데 팬들이 바라는 바다.
정영재 칼럼니스트. 중앙일보·중앙SUNDAY 스포츠 기자 출신 칼럼니스트. 2013년 스포츠 기자의 최고 영예인 ‘이길용체육기자상’을 받았다. 현재 대학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스포츠 다큐: 죽은 철인의 사회』 등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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