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열흘 앞으로 다가온 제21대 대선은 유독 여성·성평등 의제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 사회의 성평등 실현은 더는 ‘차후 과제’로 미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지난달 발표된 2023년도 기준 국가성평등지수는 2010년 첫 측정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하락했다. 그간 완만하게나마 성평등 관련 지표가 개선돼왔던 추세가 뒤집혔다는 뜻이다.
시민사회의 요구도 분명하다. 경향신문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은 지난달 독자 222명으로부터 ‘이번 대선에서 꼭 실현되어야 할 성평등 의제’ 관련 의견을 취합해 핵심 현안을 10건으로 추렸다. 이를 공직선거법상 대선 토론회 초청 기준에 따라 선정한 주요 대선후보 4인에게 지난 14일 전달하고 공약 채택 여부와 사유를 질의했다.
여성·성평등 10대 주요 의제
주요 후보들은 성평등 공약 질의에도 적극적으로 답하지 않았다. 답변 시한인 22일까지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만 답변서를 보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답변을 거절했다. 이재명 후보 측은 “관련 공약과 메시지를 통해 입장을 확인해달라”고 밝혔다. 김문수 후보 측은 “답변이 어렵다”고 전해왔다. 플랫은 10대 현안에 대한 후보 4인의 여성·성평등 공약을 비교했다. 이준석·권영국 후보는 답변서에 기초했고, 이재명·김문수 후보는 이날까지 공식 발표한 여성 관련 공약, 후보 공개 발언을 기반으로 정리했다.
권영국만 “비동의강간죄 도입”…‘여성안전’ 공약은 대부분 채택
설문 참여자 222명 중 약 절반(48.6%)은 젠더폭력 근절을 가장 해결해야 할 문제로 꼽았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보장과 젠더폭력 대책, 낙태죄 대체입법 등과 관련한 공약을 가장 적극적으로 채택한 것은 권영국 후보다. 권영국 후보 측은 “현행 형법을 개정해 ‘상대방의 동의 여부’와 ‘심신상실 등의 상태를 이용해 성교를 맺는 경우’를 추가적으로 명시해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실질적으로 보호하겠다”고 답했다.
권영국 후보 측은 또 여성혐오범죄를 전담으로 다루는 부서, 디지털성폭력 문제를 전담하는 TF를 ‘성평등부’ 산하에 설치하겠다고 공약했다. 글로벌 플랫폼 기업이 디지털범죄 가해자 검거에 협조하게끔 강제조항을 도입하겠다고도 했다. 안전한 임신중지 및 여성의 재생산권을 보장하겠다는 공약도 유일하게 채택했다.
이재명 후보 공약에는 비동의강간죄에 관한 언급이 없다. 이재명 후보는 지난 16일 페이스북에 올린 여성 공약을 통해 “여성이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다”며 교제폭력 범죄 처벌 강화·가해자 접근금지 명령 실효성 확보·디지털 성범죄 처벌 강화 등을 약속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비동의강간죄를 공약하지 않았다. 김문수 후보는 지난 20일 발표한 여성 공약에서 교제폭력·스토킹범죄·가정폭력 등 각종 폭력피해 보호 법체계를 보완하고 예방 제도를 정비하겠다고 했다.
이준석 후보는 상당수의 질의에 ‘입법부와 법원 등에서 결정할 일’이라는 취지로 답했다. 이준석 후보 측은 “강간죄 구성요건은 입법부의 권한 또는 법원의 판단 영역”이며 “피해자 권익 보호 제도는 필요하나 법률 정비는 국회의 입법 사항”이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낙태죄에 관해서도 “대체입법은 국회의 입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준석 후보 측은 “국회에서 심도 있게 논의를 거쳐 입법된 사항이라면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이상 거부권 행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성별임금차이 등 ‘일터에서의 성차별’ 해소 방안은
여성 성평등 10대 의제
성별임금격차 해소 방안을 공약에서 언급한 것은 이재명 후보와 권영국 후보 둘뿐이다. 이재명 후보는 “고용평등 임금공시제를 도입해 성별임금격차를 개선해 나가겠다”고 했다. 권영국 후보는 성평등 임금공시제 도입에 더해 성별임금격차해소법을 제정하겠다고 했다. 권영국 후보는 “성별 고용률과 관리자 비율, 성별 평균임금뿐 아니라 직급별·직군별 성비, 성별에 따른 고용형태 등을 상세히 포함하는 성평등 임금공시제를 공공과 민간에 전면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이준석 후보 측은 답변서에서 “성별의 차이로 채용과정에서 차별하거나 동일 업무임에도 성별로 임금을 차별하는 것은 근절해야 한다”고 했지만 관련 공약을 내지는 않았다.
그 밖에 이재명 후보는 경력보유 여성 채용 기업에 대한 세제 지원 강화를 공약했다. ‘일하는 모든 취업자’로 육아휴직을 단계적 확대하겠다고도 했다. 김문수 후보는 양성평등 채용 목표제를 공공기관까지 확대 추진하고, 유연근무제 등으로 경력단절 없는 일터를 조성하겠다고 했다. ‘워킹맘’의 가사·육아 고민을 덜기 위해 아이돌봄서비스를 전면 확대하고 가사도우미 이용을 지원하겠다고도 밝혔다. 남성의 돌봄 분담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이준석 후보 측은 “성별 관계없이 (육아휴직) 이용이 촉진될 수 있도록 해 돌봄 부담을 해소하겠다”이라고 답했다. 권영국 후보 측은 전 국민 4대 보험을 도입해 프리랜서·특수고용 노동자 등 육아휴직 사각지대를 없애겠다고 했다. 육아휴직 각 부모 할당제 도입, 육아휴직급여 실질적 소득대체율 70%(현재 약 40%)로 상향 등도 공약했다.
‘여성 대표성 확대, 성평등 관계부처 강화’ 공약도 부실
여성 성평등 10대 주요 의제
내각 성비에 대해서는 권영국 후보만 유일하게 ‘남녀동수내각 구성’을 약속했다. 권영국 후보는 국회의원 및 지방의원 선거에 전면 비례대표제를 도입해 자연스럽게 남녀동수 의회를 구성하도록 하겠다고도 공약했다. 이재명 후보는 공공기관에 성별 평등 지표를 적극 반영하겠다고 했지만, 내각 성비 등 여성 대표성 관련 핵심 의제는 공약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김문수 후보도 관련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준석 후보 측은 “내각 구성은 연공서열이 파괴된 실력 위주가 될 것으로 기계적 성평등에 의한 동수 내각은 지양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여성가족부에 해당하는 성평등 관계 부처의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후보도 권영국 후보밖에 없다. 권영국 후보는 여성가족부를 부총리급 ‘성평등부’로 격상하고 기능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성평등부를 전 부처를 망라하는 성평등 컨트롤타워로 삼고 성평등부총리를 신설하겠다고도 했다.
이재명 후보와 김문수 후보는 여성가족부에 관해 직접 언급한 적이 없다. 이준석 후보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실패했던 ‘여성가족부 폐지’를 다시 공약했다. 현행 19개 부처를 13개로 축소 개편하면서 여성가족부도 폐지하고 관련 기능을 복지부 등으로 이관하겠다는 구상이다.
차별금지법, 이재명은 ‘나중에’ 김문수는 ‘안 돼’
포괄적 차별금지법 도입, 온·오프라인상 혐오·차별 표현 근절에 대해서도 대부분이 소극적이었다. 이재명 후보는 지난 18일 토론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해 “방향은 맞다고 보지만 현안들이 복잡한 게 많이 얽혀 있어서 이걸로 새롭게 논쟁과 갈등이 심화되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을 하기 어렵다”며 입법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김문수 후보는 20일 방송연설에서 “이 법대로라면 조두순이 초등학교 수위를 한다고 해도 막으면 차별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다른 발언을 내놓기까지 했다.
권영국 후보만 “여성을 포함한 모든 성별과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그 외 모든 부당한 차별로부터 모든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재명 후보는 교육 분야 공약에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하겠다’는 공약을 포함시켰다. 권영국 후보는 포괄적 성교육을 도입해 ‘성적 동의’와 ‘성적 자기결정권’ 등 핵심 가치를 학습할 수 있도록 하고, 젠더 기반 혐오·차별 표현을 근절하겠다고 했다. 이준석 후보는 혐오·차별 표현에 대해 “근절이 반드시 필요하다. 제도를 신속하게 도입하겠다”고 답했지만 별도의 공약을 내놓지는 않았다.
혼인제도에서의 성별 제한 철폐(동성혼 허용)와 생활동반자법을 두고는 권영국 후보가 민법 개정을 통해 동성혼을 법제화하는 혼인평등법을 실현하겠다고 답했다. 현행 민법에는 혼인을 ‘당사자 쌍방’의 신고로 성립한다고 규정할 뿐 성별에 관한 언급은 없는데, 동성일 경우 관습적으로 차별받는 점을 감안해 ‘성별에 관계없이’ 혼인이 성립함을 분명히 하겠다는 것이다.
김문수 후보는 신뢰 기반 ‘지정돌봄인 등록제’를 도입해 1인 및 비혼가구의 긴급 상황 대응력과 심리적 안전망을 강화하겠다고 공약했다. 다른 후보들은 관련 공약을 내지 않았다.
시대착오적 ‘군가산점제 부활’도…“성평등 없는 대선 우려”
이번 대선에서는 여성 공약은 아니지만 성평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을 일으키는 공약도 있다. 김문수 후보는 청년 정책 일환으로 군가산점제를 들고 나왔다. 군가산점제는 1999년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전원일치로 위헌 판결을 내려 폐지된 바 있는데, 이를 부활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김문수 후보는 여성희망복무제(여성전문군인제)를 도입하겠다고도 공약했다.
이재명 후보는 10대 공약에 ‘군 복무 경력 호봉 반영’을 포함했다. 이에 항의하는 시민에게 당시 이재명 후보의 총괄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이던 김문수 민주당 의원이 “여성은 출산가산점이 있을 것”이라고 답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민주당은 출산가산점을 검토한 적이 없다고 진화했고, 김 의원은 선대본에서 사퇴했다.
전문가들은 ‘윤석열 정부에서 무너진 성평등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를 논의해야 할 시점에 대선 후보들이 성평등 의제에 소극적인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부 후보들이 공약에 교제폭력·스토킹 예방 및 처벌, 안심귀가 등 개별 사업 수준의 과제를 나열했을 뿐 더 큰 틀에서 젠더폭력을 구조적·근본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제시하지 않았다”라며 “대선 후보들의 공약과 발언에서 ‘성평등’이란 표현이 사라지고 성평등 추진 체계 강화 방안이 거론되지 않는 점도 문제”라고 말했다.
▼ 김서영 기자 westzero@khan.kr · 남지원 기자 somnia@khan.kr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남지원 기자 somni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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