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한대 얻어 맞은 것 같았다.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 데, 여파가 국내 반도체 산업에 미칠 걸 예상하니 아찔했다. 엔비디아가 대만에 미국 본사와 맞먹는 사옥을 짓겠다고 한 발표 때문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19일(현지시간) 열린 컴퓨텍스 기조연설에서 “타이베이시 인근 베이터우스린 과학단지에 새로운 오피스를 구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황 CEO는 지난해 같은 행사에서 “향후 5년 내 대만에 대규모 R&D·디자인 센터를 건립해 1000여명의 엔지니어를 고용할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이번에 지역을 확정하며 진척을 알렸다.
엔비디아가 미국 실리콘밸리에 이은 제2의 본사로 대만을 낙점한 이유를 분석하는 건 어렵지 않다. 엔비디아가 설계하는 인공지능(AI) 반도체를 세계에서 가장 잘 만드는 곳이 대만에 몰려 있어서다.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인 TSMC를 비롯해 반도체 패키징 및 테스트 분야 1위인 ASE, 모든 하드웨어를 다 만들어 낼 줄 아는 전자제품 위탁생산 기업 폭스콘까지, 대만의 IT 생태계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지 않아도 왜 엔비디아가 대만을 낙점했는 지 금새 알 수 있다.
간단한 예로 AI는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고, 이에 걸맞는 반도체가 필요할 것인 데, 전에 없던 칩을 만들려면 세계에서 반도체를 가장 잘 만드는 곳과 협력해야 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19일(현지시간) 컴퓨텍스 기조연설에서 대만 신사옥을 공개했다. (사진=김영호 기자)
머리로는 이해가 됐지만 가슴 속에는 불안이 싹텄다. 파운드리를 포함한 시스템 반도체는 한국이 점점 넘을 수 없게 벽이 쌓이다 못 해, 이대로는 메모리도 위태할 수 있겠다는 걱정에서다.
현재 AI 반도체는 그래픽처리장치(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의 조합으로 만든다. GPU는 엔비디아가, HBM은 SK하이닉스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두 반도체 간 경계가 분명해 동등한 협력 관계에 있지만 변화가 생기고 있다. HBM에 연산 기능, 즉 시스템 반도체 기능이 들어가면서 경계가 무너지는 중이다.
실제로 내년부터 본격 상용화될 HBM4의 경우 하단(베이스 다이)에 로직이 설계된다. 지금까지 자체적으로 HBM을 만들어 온 SK하이닉스는 HBM4부터 TSMC의 힘을 빌린다. HBM에 로직을 구현할 능력, 즉 시스템 반도체와 파운드리에서 TSMC가 앞서기 때문이다.
이 의미는 HBM 주도권이 시스템 반도체 쪽으로 기울고, 자칫하다가는 메모리 기업들이 D램 셀만 공급하게 되는 수준에 머무를 수 있다는 얘기다. 고부가 창출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너무 극단적인 상상일까. 아니다. 앞으로는 기울기가 더 가속화될 수 있다. HBM4에서는 간단한 로직이 들어가지만 앞으로는 GPU가 HBM과 완전히 통합되는 방향으로 기술 개발이 진행 중이다. 시스템 반도체를 설계 및 제조 능력이 없으면 더욱 종속적 관계가 된다.
시스템 반도체 설계 능력과 파운드리를 갖추고 있는 삼성전자가 있어 그나마 다행일 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 반도체엔 여유가 없다. 삼성도 힘에 부치는 모습이다. 한국 반도체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지 전에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할 것이다.
윤건일 소재부품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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