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5년이 AI 강국 ‘골든타임’
GPU·데이터 확보 없이는 요원
연내 GPU 1만장 목표로는 부족
데이터 확보 위한 규제특례 필요
2023년 12월. 기시다 후미오 당시 일본 총리는 도쿄 관저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그래픽처리장치(GPU) 얘기부터 꺼냈다.
전 세계적으로 엔비디아의 GPU가 품귀현상을 빚고 있는 가운데 기시다 총리는 황 CEO에게 GPU를 최대한 많이 공급해달라며 신신당부했다.
인공지능(AI) 산업 육성에 대한 일본의 강한 의지를 확인한 황 CEO는 “일본의 요구를 최우선으로 처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기시다 총리에게 약속했다.
이듬해 2분기 일본의 AI 스타트업 사카나AI가 설립 1년 만에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사)에 등극해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정부는 구글 연구원 출신들이 세운 사나키AI가 무상으로 GPU를 사용할 수 있도록 밀어주며 초기 성장을 도왔다. 사나키AI는 지난해 9월 엔비디아의 투자까지 유치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는 AI 산업에서 국가 지도자의 역할과 정부의 빠른 정책 전환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국가 대항전’ 된 GPU 확보戰…인프라·모델 고도화 위해 필수=제21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보름 앞둔 우리나라 역시 차기 정부의 임기 5년이 AI 강국으로 올라서기 위한 ‘골든타임’으로 꼽힌다. ▶관련기사 3면
여러가지 지표 면에서 우리나라의 AI 역량은 주요국보다 크게 뒤쳐진 상황이다.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의 글로벌 AI 지수(27)는 미국(100)의 4분의 1, 중국(54)의 절반 수준이다. AI 특허건수(지난해 1~10월)는 1537건으로 미(8609건)·중(1만2945건)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경제계와 산업계는 우리나라가 AI 3대 강국으로 도약하려면 우선 AI의 ‘3대 연료’로 꼽히는 데이터·인재·전력부터 확보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를 통해 3대 밸류체인(인프라·모델·AI전환)을 고도화하는 선순환 구조 구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그 중에서도 GPU는 AI 전장터에 나가기 위해 반드시 지녀야 할 ‘총알’에 비유될 만큼 핵심 인프라로 꼽힌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고성능 GPU를 최소 5만장 이상 확보하겠다고 공약한 상태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수십만장의 GPU를 보유한 것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아직 현저하게 부족한 수준이다. 페이스북을 운영하는 메타(Meta)는 약 12조원을 투자해 엔비디아의 고성능 GPU ‘H100’을 35만장 확보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테슬라도 각각 15만장, 10만장을 구매했다.
H100 한 장당 가격은 약 5500만원 수준이다. 엔비디아가 올해 본격 공급에 나선 최신 GPU인 블랙웰 기반의 ‘B100’ 한 장은 약 7000만원이다. 최근 엔비디아는 미국의 대중(對中) 반도체 수출 규제로 직격탄을 맞자 수익성 확보를 위해 GPU 가격을 10~25% 인상한 것으로 전해졌다. AI 전쟁을 두고 ‘쩐의 전쟁’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일선 기업과 학교, 연구소가 비싼 가격 탓에 GPU 확보에 애를 먹어 AI 모델 개발에 차질을 빚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지난달 의결한 추가경정예산 1조8000억원 중 1조5000억원을 고성능 GPU 1만장 확보에 쓰겠다고 공언했다. 구체적으로 H200 GPU 6400장, B200 GPU 3600장 구매를 고려 중이다. 내년에는 추가로 1만8000장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AI 성능 좌우하는 고품질 데이터 규제 특례 필요=고성능 GPU를 확보하더라도 양질의 데이터 없이는 무용지물이다. 데이터는 AI 산업의 ‘엔진’으로 불린다. 양질의 데이터가 AI 모델의 성능과 경쟁력을 좌우하기 떄문이다. 정부는 이번 추경 예산 중 데이터 확보에 300억원을 반영했다.
한국인공지능법학회장을 맡고 있는 최경진 가천대 법학과 교수는 2월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가 주최한 AI 현안 공청회에서 “우리나라가 AI에서 뒤진 이유 중 하나가 데이터 확보에 대해 관심을 덜 기울였기 때문”이라며 “데이터를 AI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우리의 숙제”라고 강조했다.
경제5단체는 대선을 앞두고 발간한 ‘미래성장을 위한 국민과 기업의 제안’ 보고서에서 좋은 성능의 AI 모델 및 더 나은 품질의 AI 서비스를 위해 더 많은 개인·기업·공공 데이터 투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미 주요 국가와 기업들은 데이터 확보에 사활을 건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오픈AI는 언론사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고 미국의 초대형 소셜 뉴스 웹사이트 레딧 지분을 활용해 고품질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다. 구글 역시 레딧과 6000만달러(약 840억원) 규모의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다. 일론 머스크의 AI 회사 xAI는 엑스(구 트위터)의 데이터를, 메타는 직접 운영하는 페이스북·인스타그램 데이터를 활용한다.
우리나라도 고유의 AI 서비스 산업 확장을 위해 한국어 기반 고품질 학습데이터와 산업별 특화 데이터의 지속적 확충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현재 개인정보와 저작권 이슈로 인해 고급 데이터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구현모 KASIT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겸임교수는 데이터 규제 특례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구 교수는 “(데이터를) 모으려고 하더라도 너무 허들이 많다”며 “의료데이터의 경우 환자단체에서 반대해 진전이 안 된다. 이런 문제들은 결국 법이나 규정을 정비해서 뚫어줘야 된다. 그런 면에서 데이터 관련 규제특례가 마련돼야 된다”고 주장했다.
경제5단체는 유럽의 ‘공통 유럽 데이터 공간(Common European Data Spaces)’를 본따 ‘공통 한국 데이터 공간(Common Korea Data Space)’ 구축을 제안했다. 유럽연합(EU)은 데이터 주권보호 전략 차원에서 EU 국가들끼리만 데이터를 공유하는 역내 데이터 단일시장을 조성했다. 우리나라도 정부 주도로 K-데이터 공용 허브를 확대해 고품질 데이터를 확충하고, 공공 데이터의 개방을 지속적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현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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