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필의 미래창
유전체 분석해 2만km 이주 경로 추적
남미에서 고립 후 네가지 혈통 갈라져
아메리카 원주민은 아시아인, 특히 서베링육교 지역에서 이주한 아시아인의 후손으로 나타났다. 페루 안데스족의 한 전통무용 축제 현장. 위키미디어 코먼스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인류는 마지막 빙하기(11만5천년~1만1700년 전) 진입 시점을 전후로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섰다. 아프리카 북동쪽과 이어져 있는 중동 지역을 길목으로 삼아 여러 차례에 걸쳐 기약없는 여정에 들어섰다. 지구 곳곳이 큰 기후 변화를 겪었던 이때, 어떤 곳은 좀 더 혹독한 환경이 됐고, 어떤 곳은 좀 더 온화한 곳으로 바뀌었다.
고향을 떠난 인류가 육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며 정착한 이주지 가운데 고향 아프리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 아메리카 대륙, 그 중에서도 남미 지역이다. 수만년에 걸친 기나긴 이주 역사의 종착지는 남미의 끝자락 파타고니아다.
그동안의 연구에 따르면, 인류는 4만5천년 전 북위 50도의 서시베리아 유라시아에 당도했고, 3만1600년 전에는 북위 71도의 베링육교(Beringia)에 도착했다. 베링육교는 시베리아와 알래스카를 잇는 지역으로, 빙하기가 끝나고 해수면이 상승해 베링해가 형성되기 전의 땅을 말한다. 베링육교는 가장 넓었을 때 폭이 1600km나 됐다. 인류가 베링육교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진입한 때는 최소한 2만3천년 전이다.
싱가포르 난양공대가 주축이 된 48명의 국제연구진이 남아메리카와 북동 유라시아의 139개 인구 집단에서 추출한 1537개 유전체를 분석한 결과, 아메리카 원주민은 아시아인, 특히 서베링육교 지역에서 이주한 아시아인의 후손이라는 걸 밝혀내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서베링육교 지역의 코랴크족과 이누이트족은 700년~5100년 사이의 유전자 흐름을 거쳐 각각 5%와 28%의 아메리카 원주민 혈통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수천년에 걸쳐 북아시아에서 남미 최남단까지 2만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이동했다. 이번 연구는 ‘10만 게놈아시아’ 컨소시엄의 일환으로 수집한 데이터를 분석한 것이다.
남미에 도착한 아시아인은 지리적으로 고립되면서 네가지 혈통으로 갈라졌다. 사이언스
1만4천년 전 파나마지협에 도착
연구진은 유전자 변이 패턴을 비교하는 방법을 이용해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북아시아를 거쳐 현재의 아르헨티나 티에라델푸에고에 이르는 고대 이주 경로를 추적했다.
이를 통해 이주 경로를 재구성한 결과, 초기 이주민들은 약 1만4천년 전에 남아메리카 북서쪽 끝, 즉 오늘날의 파나마와 콜롬비아 경계지역, 즉 파나마지협(Isthmus of Panama)에 도착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때 초기 이주민들은 이미 북미에 널리 흩어져 살고 있었다.
폭이 50~200km에 불과한 파나마지협은 남미로 이주한 집단에 창시자효과(Founder Effect)를 유발했다. 창시자 효과란 유전학에서 소수의 개체들이 원래의 큰 집단에서 분리돼, 유전적 구성이 다른 새로운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후 남미 이주민들은 4개 집단으로 갈라져 현대 남미인의 중심 혈통을 형성했다. 한 그룹은 아마존 분지에 남았고, 나머지 세그룹은 동쪽 드라이차코 지역과 남쪽 파타고니아 빙원, 안데스산맥의 계곡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고립된 처지의 남미 원주민들은 마치 섬 주민들처럼 유전적 다양성이 약해지고 동질성이 강해졌다. 연구진에 따르면 가장 먼 파타고니아로 이주한 집단의 유전적 다양성이 가장 낮았다. 이로 인해 지난 1만년 동안 4개 남미 원주민 혈통은 모두 38~80%의 인구 감소를 경험했다.
남미 최남단 파타고니아 풍경. 아시아에 있던 인류는 수천년에 걸쳐 2만km를 걸어 이곳까지 왔다. 픽사베이
유전적 다양성 감소로 면역력 약화
다른 지역 집단과의 교류가 거의 없는 상태로 1만3천년 이상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오던 이들은 1600년대 초기 서유럽 식민지 개척자들이 도착하면서 중대한 생존 위기를 맞았다.
연구를 이끈 김희림 난양공대 교수는 보도자료를 통해 “유전적 다양성 감소는 면역력 관련 유전자 다양성 감소로 이어졌다”며 “이는 이 지역 원주민 공동체가 유럽 식민지 개척자들이 들여온 질병에 더 취약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논문 제1저자인 스테판 슈스터 교수는 “이번 연구는 표본이 서구인에게 편향돼 있는 대규모 게놈 시퀀싱 프로젝트가 오랫동안 가정해 온 것과 달리 유럽인이 아닌 아시아인에게서 더 다양한 인간 게놈이 발견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아시아인은 인류의 절반을 차지하지만, 대규모 게놈 연구에서 아시아인의 비중은 전체의 6%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유전적 구성을 더 잘 이해하고 원주민 사회를 더 잘 보호,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논문 정보
From North Asia to South America: Tracing the longest human migration through genomic sequencing. Science(2025)
DOI: 10.1126/science.adk5081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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