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돼가는 돌봄… 시민·전문가 모여 경험담 나눈 뒤 정책 구체화할 예정
2025년 5월10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국사회복지회관 6층 대회의실에서 ‘100인 돌봄시민회의’ 참석자들이 한겨레21 제1563호(‘돌봄 대통령’을 찾습니다)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100인 돌봄시민회의 제공
“청소년은 돌봄을 받는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누구나 어릴 때부터 남을 돌볼 수 있다는 것을 보편적인 교육을 통해 배울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20년 동안 부모 돌봄을 한 특성화고 교사 보란씨)
“가족 돌봄의 가장 어려운 점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는 가이드라인이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가족 간병의 가이드라인이 마련되면 좋겠다. 돌봄 경험이 있어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순간 모든 것이 허무하게 사라지는데, 이런 경험을 활용해서 돌봄 코디네이터나 케어매니저 등 돌봄 직업으로 승화시킬 수 있으면 좋겠다.”(김경애씨)
2025년 5월10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국사회복지회관 6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100인 돌봄시민회의’에는 돌봄 노동을 하고 있거나 돌봄을 받고 있는 당사자, 사회복지사·요양보호사·의사·간호사와 일반 시민 등 돌봄 정책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경험담과 정책 대안을 공유했다.
재단법인 돌봄과 미래, 돌봄 청년 커뮤니티 ‘엔(N)인분’, 사회적 협동조합 ‘빠띠’가 공동으로 개최한 이날 회의는 N인분 조기현 대표의 사회로 진행됐고, 전국 각지에서 아침 일찍부터 참가자들이 모였다. 회의는 △가족돌봄자 지원 △치매 및 인지장애 돌봄 △장애인 돌봄과 발달장애 자녀 돌봄 △암환자·중증질환자 돌봄 △생애 말기 돌봄(호스피스 등) △재가 돌봄 △정신장애 돌봄 △의료-간병 통합 시스템 △지역사회·이웃 기반 돌봄 △청년 돌봄 등 10개 주제 분과로 나눠 진행됐다.
우선 각자의 돌봄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이 되자 돌봄의 부담과 책임이 개인과 가족에게 짐 지워진 상태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경제적 어려움 등에 대한 토로가 쏟아졌다. 파킨슨병을 앓는 어머니를 9년 동안 돌봤다는 혜재씨는 “열심히 치료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증상은 악화되고 입퇴원을 반복하고 병원비로 수억원을 쓰며 ‘간병 파산’에 이른 뒤 최근 요양원으로 모시게 됐다”며 “진료를 받고,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병원마다 개인의 병력이 연계가 안 되는 부분이 너무 불편하다. 병원 바뀔 때마다 약도 바뀌고 돌봄은 어떻게 할지, 목욕 서비스 이런 부분도 다 개인이 신청해서 연계해야 하는 부분이 개선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뇌출혈로 쓰러진 어머니를 10년째 돌보고 있는 김영희(가명)씨는 “직장에 다니면서 계속 돌봄을 했는데, 8년이 지나니 주변에 사람이 없어지고 스스로 고립돼 돌봄 제공자는 마치 이 사회에서 없는 존재가 되더라”라며 “돌봄 노동자의 처우 개선이 필요하지만 보호 가족 입장에선 요양보호사들이 쇼핑하듯 대상자를 고른다는 느낌을 받기도 해, 보호 가족이 상처받지 않고 보호사를 매칭할 수 있는 제도적 고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25년 5월10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국사회복지회관에서 열린 ‘100인 돌봄시민회의’ 참석자들이 각자의 돌봄 경험과 정책 대안을 공유하고 있다. 이재호 기자
치매 노인이나 정신질환자가 시설에 갇히지 않고, 집과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탈시설’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컸다. 한국은 정신질환 당사자들이 병원에서 상태가 호전돼 사회로 나와도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과 주거 등의 문제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다시 증상이 악화해 병원에 입원하는 일을 반복하는 ‘회전문 현상’이 심각하다.
한겨레21 제1563호 표지이야기 ‘돌보는 사람은 누가 돌보나’에서도 인터뷰했던 양극성 정동장애(조울증)를 앓는 어머니와 동생을 돌보는 이희진(32·가명)씨는 “현재 정신질환자들에게 주어지는 직업재활 프로그램은 당사자의 희망이나 과거 경험에 대한 고려 없이 일괄적으로 바리스타 양성 교육을 하는 방식이어서 실효성이 크지 않은 것 같다”며 “탈시설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환자들이 병원을 나온 뒤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병원에서 나오기 전 지역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주거와 돌봄, 일상생활 지원 등 지역사회에서 회복을 도울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신질환 당사자인 이광호씨는 “정신질환자가 지역사회에서 일하고 독립적으로 거주할 수 있어야 하는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병원과 사회를 연결하는 정신질환자 쉼터와 같은 곳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며 “정신질환을 경험한 것이 숨겨야 하거나 잃어버린 시간으로 치부되는 게 아니라, 사회에서 의미 있는 경험이나 경제적 혹은 사회적 자원으로 인식되길 바란다”고 했다.
인천에서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7년째 돌보는 이은희(가명)씨는 “인지능력이 있어도 자녀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서 요양원에 입원하는 분들도 있는데, 집에서 돌보기는 어렵지만 요양원에 가기에는 건강한 노인들이 갈 수 있는 중간 단계의 회복센터가 있으면 좋겠다”며 “재가 돌봄을 해보면 당사자가 아프거나 좋지 않을 때 무조건 119를 불러서 응급실로 들어가야 진료를 받을 수 있어 불편이 크므로, 방문진료도 가능하면 좋겠다”고 했다.
탈시설과 관련해선 언론에서 옹호와 반대 논리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도하는 경향이 있지만 본질은 그렇지 않다는 지적이 나왔다. 장숙랑 중앙대 적십자간호대학 학장(100인 돌봄시민회의 정책 멘토 총괄)은 한겨레21에 “탈시설을 찬성하는 쪽은 시설에 있는 만큼 돌봄 부담이 커지지 않도록 지역사회 돌봄 체계를 지원해서 집에 있도록 선택권을 달라는 것이고, 탈시설에 반대하는 쪽은 지역사회에서 돌볼 자원이 없어 시설에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시설을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라며 “결국 양쪽 모두 돌봄과 관련된 선택권을 보장해달라는 같은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인데, 둘이 양립할 수 없이 대립하는 것처럼 (언론에) 비쳐져 안타깝다”고 했다.
2025년 5월10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국사회복지회관에서 열린 ‘100인 돌봄시민회의’에 참석한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가 돌봄 정책에 대한 의견을 발표하고 있다. 이재호 기자
100인 돌봄시민회의 주최 쪽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민주노동당과 개혁신당 등 모든 정당의 대선 후보에게 초청장을 보냈지만 이날 행사에는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만 직접 참가했다. 민주당에선 지방 일정에 나선 이재명 대선 후보를 대신해 남인순 선거대책위원회 직능본부장(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는 공식 대선 운동 기간이 시작된 5월12일 이전에 실시돼, 대선 후보나 국회의원들이 시민들의 요구를 듣고 직접 ‘공약’으로 밝힐 수는 없었다. 대신, 각자가 생각하는 돌봄 의제에 대한 의견을 간단하게 밝혔다.
권영국 후보는 “국가가 돌봄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겠지만, 실제 노동 과정에선 돌봄 노동의 가치 문제가 빠지기 쉽다. 지역 돌봄이든 국가 돌봄이든, 돌봄 노동자의 처우가 개선되고 돌봄 노동이 존중받으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며 “돌봄 노동자들이 반드시 단체교섭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하고, 돌봄 노동의 표준을 만들어서 전체적으로 노동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인순 직능본부장은 “이재명 후보는 지난 대선에서도 돌봄 국가책임제를 약속한 바 있는데 돌봄에 대한 국가 책임, 종사자 처우가 개선돼야 돌봄 노동자도 좋은 환경에서 하고, 서비스받는 사람들도 행복한 돌봄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며 “사회서비스원 설립을 의무화하는 사회서비스원법 개정안(사회서비스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발이 묶여 있는데 보건복지부가 설치 의무를 반대하고 있지만 반드시 법을 통과시키겠다”고 했다.
현장 즉석 질의 시간에 이광호씨는 “병식(병에 걸린 상태에 대한 인식)이 없는 정신질환자는 병원에 가지 않는데 진단명이 없으면 복지센터나 지원제도 안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정신질환이 악화돼 폭력성이나 위험 증상이 있어야만 복지 지원이 시작된다”며 “이러한 정신건강 복지 지원 체계를 완화하고, 사회적 낙인 등으로 지역사회 돌봄을 제공하는 가족 당사자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법 제도를 개선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남인순 직능본부장은 “돌봄시민회의에서 정신질환자의 증상과 진단 사이 괴리가 있는 문제를 이야기했는데,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돌봄 테두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고, 정신장애 관련 법도 개정해 치유와 회복 과정에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함께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준비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날 회의 말미에는 각 분과에서 제안한 돌봄 정책을 현장에서 직접 투표로 우선순위를 매겨 발표했다. 참가자들이 가장 도입이 시급한 정책으로 꼽은 정책은 25명이 투표한 △지역/마을 중심 돌봄 생태계(돌봄 센터, 돌봄 편의점, 돌봄 지원주택 등) 구축이었다. 이날 참가자들은 한 명당 두 개의 정책에 투표했다. △돌봄활동가, 이웃돌봄자, 케어코디네이터 등의 활동 활성화 △(법정)돌봄 시민 교육 도입 △돌봄 관련 공공보건의료 인프라 강화(간병비 의료보험화, 주치의 제도 등) △정신질환 사회적 인정 요건 완화 △욕구 중심 돌봄 서비스 체계 구축 등이 뒤를 이었다.
주최 쪽은 이날 시민들이 낸 돌봄 정책 공약을 토대로 1만인 서명 캠페인을 진행해 더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구한다는 계획이다. 이후 100인 돌봄시민회의 참석자들의 발언과 정책안,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구체화 방안을 담은 결과 보고서를 만들고 대선 후보자 캠프와 보건복지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등에 배포할 예정이다. N인분의 조기현 대표는 “회의 내용과 정책을 ‘돌봄의 목소리들’(100인 돌봄시민회의, 한국 사회 돌봄의 미래를 묻다)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대선 전에 출간할 예정이다. 시민들의 이야기가 휘발되지 않고 더 울려 퍼질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단체들은 돌봄시민회의를 정례화하고, 2026년 6월로 예정된 지방선거에서 각 지역 특성에 맞춘 돌봄 정책을 요구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장숙랑 교수는 “돌봄 현장의 당사자들, 돌봄 문제를 풀고 싶은 시민들, 정책 멘토들, 심리안전 전문가들, 돌봄지원가 등이 모여 사적인 경험을 공적으로 논의하고 정책으로 연결한 것 자체가 많은 이들에게 효능감을 주었다”며 “앞으로는 (돌봄을 하느라) 직접 참석하지 못하는 이들도 함께할 수 있는 형식을 고민하고, 다양한 돌봄의 사연과 정책이 나올 수 있게 진행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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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기자 ph@hani.co.kr
2025년 5월10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국사회복지회관 6층 대회의실에서 ‘100인 돌봄시민회의’ 참석자들이 한겨레21 제1563호(‘돌봄 대통령’을 찾습니다)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100인 돌봄시민회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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