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간 노동 해결의 사회적 요구 커져…제도화 여부는 새 정부 과제
민주, 임금 손실 없는 노동시간 단축…국힘, 유연근무제 확대 초점
노동·시민사회단체 주4일 네트워크가 4월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주 4일제 도입 및 노동시간 단축 요구안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6월 3일 대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일제히 ‘주 4.5일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장시간 노동에 따른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회적 요구가 커지는 가운데 주 4.5일제는 대선의 주요 정책의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두 정당이 제시한 정책은 겉으로는 유사하지만, 추진 목표와 실행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임금 손실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한국사회의 장시간 노동 구조를 바꾸겠다는 입장이다. 2023년 기준 한국의 평균 연간 노동시간은 1872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여섯 번째로 높다. OECD 평균 연간 노동시간은 1742시간으로 한국보다 약 130시간 적다. 이 후보는 지난 4월 30일 자신의 SNS에서 “평균 노동시간을 2030년까지 OECD 평균 이하로 단축하겠다”라며 “기업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고 주 4.5일제 도입 기업에 확실한 지원방안을 만들어 장기적으로 주 4일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또 장시간 노동과 ‘공짜 노동’의 원인으로 지목돼온 포괄임금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히면서 “지속 가능한 일과 삶의 조화를 위해 과감한 정책 전환에 나서야 한다”고도 했다.
반면 국민의힘이 제시한 주 4.5일제는 근무시간 단축이 아닌 유연근무제 확대에 초점을 맞췄다. 권영세 국민의힘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4월 14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주 4.5일제’ 도입을 대선 공약으로 발표했다. 법정 근로시간인 주 40시간은 유지하되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하루 9시간, 금요일은 4시간만 근무하는 방식으로 근무일을 조정하는 것이 골자다. 여기에 주 52시간 상한제 폐지를 더하면서 국민의힘의 ‘주 4.5일제’는 실질적인 노동시간 단축이 아닌 유연근무체계 확산에 방점을 찍고 있다. 제도적으로는 장시간 노동이 가능해지는 구조다.
사회적 의제로 부상한 ‘주 4.5일제’
여론은 실질적인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선호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노동·시민사회단체인 ‘주 4일제 네트워크’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2월 10~17일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다수는 ‘주 4.5일제’를 단순한 근무일 조정이 아닌 실질적인 근무시간 단축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주 4.5일제 도입 필요성에 대해서는 58.1%가 ‘필요하다’라고 응답해 과반을 넘겼으며, 근무시간을 주 36시간으로 단축(66.8%)하는 방안과 연장 노동 상한을 현행 52시간에서 48시간(68.9%)으로 줄이는 방안에 대해서도 높은 지지가 확인됐다.
여론조사에서 확인된 높은 지지율은 주 4.5일제, 나아가 주 4일제를 둘러싼 논의가 더는 추상적 담론이 아님을 보여준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사회적 합의를 이뤄나가야 할 핵심 정책 의제로 부상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 소장은 “지난 대선에서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주 4일제를 공약으로 내놨고 이재명 후보는 주 4.5일제를 내놨다. 국민의힘은 이에 대한 공약이 없었다. 이번 대선에서 국민의힘이 어쨌든 주 4.5일제를 내세운 것은 노동시간 단축 공약이 이제 전면 의제화됐음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거에는 다소 비현실적인 구호로 여겨졌던 주 4.5일·주 4일제가 이제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현실적 과제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지난 5월 8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대선후보 초청 경제5단체 간담회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미 주 4일제를 도입해 실질적인 성과를 보여주는 기업들도 일부 있다. 노동시간 단축이 오히려 기업 생산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사례로 평가된다.
자동문 제조업체 코아드는 국내 제조업계에서 선도적으로 주 4일제를 도입한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제조업 특성상 생산 라인의 연속성이나 납기 준수 등의 제약으로 주 4일제 도입이 어렵다는 통념을 깨고, 성수기인 11월부터 2월을 제외한 연중 8개월 동안 이를 시행 중이다. 특히 임금 삭감 없이 오히려 연봉을 인상하며 제도를 정착시켰고, 비효율적인 회의 문화를 개선하고 스마트팩토리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업무 전반을 재설계했다. 그 결과 연 매출 200억원, 영업이익률 20% 이상이라는 성과를 유지하고 있으며 신입사원 채용 경쟁률은 100 대 1에 달할 정도로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세브란스병원은 2023년 국내 의료기관 최초로 주 4일제 근무 시범사업을 도입해 간호사들의 근무환경 개선과 조직 안정성 확보에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브란스병원은 신촌·강남 세브란스 병동에서 총 30명의 간호사를 대상으로 주 4일 근무, 임금 10% 삭감 조건의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노사합의에 따라 주 4일제가 시행되면서 참여 병동에서는 퇴사율이 2021년 20.1%에서 2022년 3.6%, 2023년에는 0%로 감소했다.
한편 경기도는 6월 중 도내 300인 미만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임금 삭감 없는 주 4.5일제 시범사업을 추진한다. 경기도는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임금 보전을 위해 노동자 1인당 월 최대 26만원의 장려금을 지원한다. 경기도 관계자는 “50개 업체를 대상으로 계획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업체가 신청해 그중 83개 업체를 선정했다. 현재 기업 컨설팅 등 사전절차를 진행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주 4.5일제는 단순한 노동시간 단축을 넘어서 인공지능 기술 발전과 기후위기 등 체제 변화에 대응하는 조치로 거론되기도 한다. 김은기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2030년에는 업무의 90%를 인공지능으로 자동화할 수 있는 일자리가 전체 일자리의 90%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하며 “근로시간을 단축하고 노동시간 상한제를 명확하게 하는 것은 일자리를 나누는 차원에서도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발간한 보고서 ‘기후위기와 일의 세계’는 기후위기 대응은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라 노동시장과 산업 구조 전반의 정의로운 전환을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탄소 중립 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노동시간 단축은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촉진하는 핵심 수단이라는 주장이다. 김종진 소장은 “이미 유럽처럼 연간 노동시간이 OECD 평균보다 낮은 국가들은 단순히 개별 노동자들의 번아웃 해결만이 아니라 기후위기나 성평등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라며 “한국에서도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의제를 확장하고 전환할 필요가 있다”라고 전했다.
시작은 자율에…향후 법제화 가능성은
주 4.5일제를 두고 노동계와 재계의 입장은 엇갈린다. 양대 노총은 주 4.5일제 도입 움직임에 힘을 실었다. 한국노총은 5월 1일 이재명 후보와 정책협약을 체결하며 ‘주 4.5일제 도입 및 장시간 노동 근절’을 7대 핵심 과제 중 하나로 제시했다. 민주노총도 같은 날 발표한 대선 요구안에서 ‘주 4일제 도입’과 노동시간 단축을 주요 요구사항으로 제시했다.
반면 경영계는 난색을 보이고 있다. 재계는 주 4.5일제 도입에 대해 생산성 저하, 업무몰입도 감소, 비용 증가 등을 우려한다. 24시간 가동이 필요한 제조업과 인력난을 겪는 중소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도 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측은 “OECD 34개국 중 한국, 미국, 일본 등 대다수 국가가 법정근로시간을 주 40시간으로 법에 규정하고 있으며, 주 40시간 미만으로 정한 국가는 호주(38시간), 벨기에(38시간), 프랑스(35시간) 등 3개국에 불과하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노동생산성 향상 없이 법정근로시간만 단축하는 것은 기업의 경쟁력 저하를 초래할 것이다. 법정근로시간 단축보다는 근로시간을 노사가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노력이 우선돼야 한다”라고 전했다. 재계 관계자는 “이 정책이 어떻게 구체화될지 판단하기 어렵다”라는 전제를 달며, 법제화 여부에 따라 산업 현장에서의 대응 방식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어 “지금도 기업들이 경영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주 4일제가 법제화될 경우 일부 사업장은 제도 적용에 현실적 어려움을 겪게 될 수 있다”라며 “자칫 근로기준법 위반이 불가피한 사업장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라고 말했다.
재계는 주 4.5일제의 자율적 시행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5월 8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한국경제인협회·한국무역협회·한국경영자총협회·대한상공회의소·한국중견기업연합회가 개최한 ‘대선 후보 초청 간담회’에서 손경식 경총 회장은 이재명 후보에게 “주 4.5일제는 노사 선택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고민해 달라”고 했다. 재계 관계자는 “인재를 확보하려는 차원에서 주 4.5일제를 시행하는 일부 기업이 있을 수도 있으나 산업 전반에 봤을 때는 도움이 되기보다 부담이 된다는 쪽이 압도적이다”라며 법제화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노동계에서는 현재 주 40시간인 법정근로시간을 36시간으로 바꾸는 근로기준법 개정이 필수라고 말한다. 김은기 정책국장은 “이재명 후보는 주 4.5일제를 단계적으로 시행하겠다고 하는데 일단 조건이 되는 데부터 먼저 하겠다는 취지로 생각은 된다. 하지만 자율에만 맡긴다면 가뜩이나 불평등이 심한 노동환경의 양극화가 더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김 국장은 “법제화를 하되, 도입이 어려운 부분들에 대해서는 정부가 정책적 보완책을 제시하는 방향이 맞다”라고 말했다. 김종진 소장은 “이재명 후보가 OECD 평균 수준으로 노동시간을 낮추겠다고 했는데 과연 기업 자율에만 맡겨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하며 “만약 자율적으로 하게 된다면 노조가 있는 15%의 기업만 하게 될 텐데 양극화가 심해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또 주 4.5일제 법제화 과정에서 근로기준법 사각지대에 있는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특수고용직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하는 사람 권리보장 기본법’도 같이 논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3년 주 5일제 도입은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삶의 질 향상과 선진국형 노동체제로의 전환을 목표로 했다. 당시에도 노동계와 경영계의 입장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오늘날 주 4.5일제 논의는 근로시간 단축을 넘어, 인공지능 기술 발전과 기후위기 등 구조적 전환에 대응하는 새로운 노동 체계 재편의 일환으로 해석되고 있다. 아직 명확한 로드맵이 부재한 가운데 주 4.5일제의 제도화 여부와 추진 방식의 결정은 새로 출범할 정부가 풀어야 할 과제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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