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원스’ 박지일·고예일·김민성 인터뷰
험난했던 오디션…“떨어진 줄 알았는데 감격”
배우들 합 맞추기 위해 MT 떠나 인생사 나눠
“사랑 이야기 이면의 서브 텍스트, 연대의 노래”
뮤지컬 ‘원스’의 배우 박지일, 고예일, 김민성이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아티움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공연 시작 5분 전, 관객과 배우가 뒤섞인 ‘프리쇼’로 시끌벅적했던 무대 위 조명이 한 사람을 향한다. 40년차 배우 박지일에게다. 작고 동그란 만돌린을 둘러멘 그가 노래를 시작한다.
“유령처럼 그리움들이 서성이는 거리, 걸음을 재촉하면서 날 떠난 그대 뒷모습, 그댈 사랑하는 나의 초라한 날개는, 동이 트면 사라지리라 내 사랑도 함께” (‘라그랑로드’ 중)
읊조리듯 내뱉는 나지막한 음성은 ‘원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한 줄 한 줄 뱉어내는 감정의 깊이에 이내 객석도 숨죽이고 만다. ‘라그랑로드’는 노년의 예술가가 지나간 옛사랑을 그리며 회한에 잠긴 이야기를 담는다.
배우 박지일은 “아일랜드 사람들은 ‘아리랑’처럼 부르는 노래”라며 “즐거운 프리쇼 시간을 마무리하고 ‘원스’의 세계로 쑥 들어가는 관문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불렀다”고 했다. 이 곡은 무대 위 그의 유일한 솔로곡이다. 그래서인지 박지일은 “공연이 이어지는 시간 중 가장 떨리는 순간”이라고 돌아본다. 담담한 목소리 위로 하나둘 악기가 포개지면 ‘원스’는 본격적인 ‘공연 모드’에 들어간다.
인디 뮤지션 글랜 핸사드와 마르게타 이글로바가 남녀 주인공 역을 맡아 그 시절 2030 세대의 감성을 침투했던 영화 ‘원스’가 10년 만에 무대로 돌아왔다. 박지일은 이 무대의 오디션을 위해 10년간 기타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액터 뮤지션’ 고예일은 일생의 도전을 준비했다. 신예 김민성은 시키는 건 잘 못해도 “다 할 줄 안다”며 당돌한 패기로 오리지널 연출진을 사로잡았다.
무대를 위해 달려온 시간만 해도 1년이 넘는다. 공연이 한창인 서울 삼성동 코엑스 아티움에서 만난 박지일은 “다른 공연을 할 땐 일상에서만큼은 역할에서 빠져나오려 애를 쓰는데, 지금은 수개월 넘게 온통 이 안에 사로잡혀 있다”고 했다.
뮤지컬 ‘원스’ [신시컴퍼니 제공]
10년간 인력풀도 늘었다…‘떨어졌나’ 싶었던 오디션
모두에게 간절한 무대였다. ‘원스’는 유달리 오디션 기간이 길었다. 이 무대는 기존의 뮤지컬 공식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무대 위 배우들이 연기와 노래는 기본, 직접 악기까지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박지일은 ‘재수생’이다. 2014년 국내 초연 당시 오디션을 봤지만 소위 ‘초고속 탈락’을 마주했다. 당시를 떠올리며 그는 “MT 기타로 청춘을 보낸 나의 하찮은 연주 실력으로 인해 절망에 빠진 시기도 있었다”고 했다. 어떤 대단한 가수 앞에서도 개의치 않고 노래하고 기타를 치던 그는 “나의 실력을 인식한 순간 입도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은 박지일에게 ‘각성의 계기’가 됐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마주한 뒤 그는 매일 저녁 북한산 둘레길을 운동하던 시간을 줄여 기타를 쳤다. “밴드에 대한 크나큰 로망, 무대에서 마음껏 즐기던 초연 배우들의 공연”은 10년간 절치부심할 수 있었던 계기다.
그는 “10년이 지나니 악기도 하고 연기도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다. 인력풀이 늘었다”며 “그나마 ‘다(DA, 극중 박지일이 맡은 가이의 아버지 역)’ 역은 나이대로 인해 경쟁률이 떨어져 다행이었다”며 웃었다.
3차에 걸친 오디션 과정은 모두에게 길고 지난했다. 군입대를 고민하다 ‘원스’ 오디션을 보게 된 신예 김민성은 이몬 역할로 기타 연주를 준비했다. 막상 오디션에 가니 베이스를 연주해 보라는 주문이 나왔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할 줄도 모르는데 딱 여덟 마디, 10초 동안 베이스를 연주하며 멋진 척을 했다”고 돌아봤다. 했다고 하기도 안 했다고 하기도 애매한 길이가 바로 ‘8마디 연주’라고 한다.
뮤지컬 ‘원스’ 액터 뮤지션 고예일, 배우 박지일, 김민성(왼쪽부터). 이상섭 기자
바이올린을 전공해 영국 런던으로 유학까지 다녀와 ‘뮤지컬 연주자’로 활동하던 고예일은 한국 ‘액터 뮤지션’의 시초 격이다. ‘웃는 남자’ ‘그레이트 코멧’ 등 수많은 작품에서 바이올린 연주에 춤, 노래, 연기를 더해야 하는 곳엔 언제나 그가 있었다. ‘원스’ 오디션이 시작됐을 당시 모두가 당연히 “고예일이 되겠지”라는 이야기가 들렸기에 오디션의 부담도 컸다고 한다.
2023년 12월부터 3개월간 이어진 오디션은 배우들에게 최종 통보일도 각기 달랐다. 함께 오디션을 본 배우들이 일찌감치 합격 소식을 받을 때 고예일만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최종 오디션 날 현장에서 만났던 민성이와 ‘우리 꼭 연습실에서 다시 보자’고 했어요. 상견례 날 모두 모였는데 경력과 나이를 떠나 그 험난한 오디션을 보고 이 자리에 왔다고 생각하니 모두에게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웃음)”(고예일)
‘취업사기’ 의심…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배우의 합’으로 완성
2024년 3월 말, 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시간. ‘음악 캡틴’이자 남자주인공 가이의 전 여자친구인 고예일을 필두로 배우들은 ‘기초 다지기’를 통해 ‘원스’의 세계에 첫발을 들였다.
김민성이 무대에서 다루는 악기는 우쿨렐레, 베이스, 기타, 카혼 등 총 네 가지. 순간 “취업사기인가 의심한 순간도 있었다”지만, 김민성은 데뷔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여유롭다. 실용음악을 전공한 그는 “군입대 전 최고의 경험이 될 것 같아” 지원한 오디션에 합격해, 모두가 꿈꾸는 무대에서 뮤지컬 배우로 데뷔해 차기작까지 결정해 업계 유망주가 됐다.
뮤지컬 ‘원스’의 힘은 음악에서 나온다. 음악은 무대를 관통하는 서사이자 대사이며,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매개다. 그 힘을 만들기 위해 12명의 배우가 저마다 1개 이상의 악기를 배웠다. 온전히 ‘시간과 노력의 힘’으로 쌓아 올린 뮤지컬이 바로 이 작품이다. 매일 아침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 연습실에서 하루에 10시간씩 일 년 가까이 붙어 있으며 “사담을 나눌 새도 없이 밥 먹고 연습만 했다”고 한다.
뮤지컬 ‘원스’ 프리쇼 [신시컴퍼니 제공]
물론 배우마다 ‘악기 수업’의 습득 속도는 달랐다. 삶의 대다수 시간을 바이올린과 함께 살아온 고예일에게 ‘원스’ 악보는 “쉽고 단조로운 수준”이었다. 그는 “그동안 해오던 연주와 비교해 음의 개수가 반의반도 안 되기도 내가 이 안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를 제일 고민했다”고 돌아봤다. 기존 작품이 액터 뮤지션에게 요구하는 것은 ‘뮤지션’에 방점이 찍혀있다. 악기를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잘 움직일 수 있는지를 봤다는 것이다. ‘원스’는 ‘액터’에 방점을 찍는다. 악기 연주보다 ‘배우’로의 역량을 더 요구된 것이다. 때문에 그는 “연주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순간에도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분석하고 이입한다”고 했다.
막이 오르면 무대는 온전히 배우들의 몫이다. 노래와 연기, 춤은 물론 세트를 이루는 테이블과 의자, 악기의 조립과 해체까지 모두 책임져야 한다. 박지일은 “배우들에게 주어진 미션이 너무나 많아 공연 내내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다”며 “단 한 순간도 쉴 시간이 없다”고 귀띔했다.
공연의 성패가 배우들의 합에 달린 만큼, 사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배우들은 오리지널 창작진이 오기 직전 MT를 떠났다고 한다. 무수히 많은 미션의 성취를 위해 ‘친해질 계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함께 떠난 자리에서 배우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자리만 생기면 노래하기를 좋아했지만, 60대 중반이 돼서야 꿈을 이룬 박지일, ‘첼로 영재’로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난데없이 뮤지컬 배우로 전향한 곽희성, 뮤지션으로 내내 문을 두드렸지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던 꿈을 펴지 못했던 배우들…. 저마다 살아온 시간을 공유하자, 배우들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끈끈한 ‘동지애’가 생겼다.
이젠 ‘척하면 척’이다. 배우들은 어둠 속에서 관객이 보지 못한 순간을 산다. 고예일은 “조명이 꺼진 무대에서도 눈을 맞추며 어떤 대사에 악기를 올려야 하고, 어떤 대사에 연주해야 하는지 소통한다”고 했다.
뮤지컬 ‘원스’ 배우 고예일, 박지일, 김민성. 이상섭 기자
모든 과정은 유기적으로 흐른다. 배우들의 손동작, 발동작은 매순간 딱딱 맞아떨어진다. 무대는 단 한 명도 충돌 없이 배우들의 힘으로 새로운 공간이 태어난다. 그 장면마저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춤이 된다. 군더더기 없이 잘 짜인 무대는 버릴 것이 없다. “배우들의 움직임, 무대 전환 등 모든 요소와 디테일이 음악에 방해되지 않게 정교하게 짜여있다”(박지일)고 배우들마저 감탄한다.
이 무대에서 “늘 함께 숨 쉬고 있기에”(박지일) ‘폴링 슬롤리’를 다 함께 부를 땐 감회가 남다르다고 한다.
“서로 감격해 장면 장면마다 온전히 감정을 느껴요. 블루투스로 연결된 것처럼 서로 동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지일, 고예일, 김민성)
무수히 많은 서브 텍스트…“약자들의 삶 모여 음악으로 나누는 연대”
더블린에 살고 있는 무명의 인디 뮤지션과 체코 출신 이민자 여성의 만남. ‘원스’는 음악으로 말하는 뮤지컬이나, 아일랜드를 무대로 한 이야기 안엔 무수히 많은 ‘서브 텍스트’가 담겨있다고 배우들은 입을 모은다.
박지일은 “뮤지컬은 각자의 삶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자신의 욕망대로 하지 못하는 선한 사랑 이야기”라는 외피 아래 수많은 이야기가 덧대져있다고 말한다. “수탈과 억압, 전쟁과 학살 등 비극의 역사를 보낸 아일랜드 민족이 척박한 토양 위에서 일궈낸 음악을 통한 공동체의 의미”(박지일)가 작품 곳곳에 숨어있다.
400년에 걸친 영국의 식민 지배, 1840년 1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감자 대기근’, 20세기 후반까지 이어진 빈곤과 실업, 그럼에도 2000년대 초반 동유럽 이민자에게 과감하게 문을 열어준 아일랜드 식의 연대가 무대에 담겼다. 뮤지컬은 상처와 비애, 절망을 마주하면서도 잃지 않는 ‘아일랜드인의 회복력’을 그려간다. “배는 가라앉고 있지만, 아직은 끝이 아니”라는 ‘폴링 슬롤리’가 대표적이다.
뮤지컬 ‘원스’ [신시컴퍼니 제공]
박지일은 “꿈을 찾아 더블린으로 온 이민자들, 꿈을 좇아 뉴욕으로 향하는 더블린 사람이 이 안에 공존한다”며 “약자들의 삶이 모여 음악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배려하는 이 작품을 보며 매순간 감동하고 감탄하게 된다”고 말했다.
주입식 교육이나 과장된 화법으로 ‘사랑과 감동’을 불어넣지 않기에 작품의 여운은 더 짙다. 마지막 순간까지 ‘원스’는 잔잔히 스며든다.
고예일은 “이 작품은 모든 역할을 사랑으로 감싸안고 있다”며 “마지막 곡 ‘폴링 슬롤리’를 부를 때 4분의 시간 동안 조명이 천천히 밝아지며 새로운 희망을 그려간다. 그 순간에 마주하는 감동이 무척 크다”고 했다.
오디션부터 일 년 넘게 달려온 뮤지컬은 어느덧 막바지를 향하고 있다. 세 사람에게 이 무대는 저마다 ‘선물’이라고 한다. 생애 첫 오디션에 데뷔작으로 ‘원스’를 써넣게 된 김민성은 “방안에 틀어박혀 작곡만 하던 때에 뮤지컬은 깜깜했던 제 삶에 눈을 뜨게 해줬다”며 “‘원스’는 내게 운명 같은 작품이다. 이게 내가 가야할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고예일도 “‘원스’가 나의 인생 뮤지컬”이라며 “이 멋진 작품의 일원이라는 점에 감사하다”고 했다. 박지일은 “무대의 시간들이 인생처럼 빨리 흐른다”며 아쉬운 마음을 토로했다.
“40년 연기 인생에서 제일 작은 역할인데, 그동안 해온 작품에 드렸던 공의 열 배는 여기에 투자한 것 같아요. (웃음) 서로의 음악과 눈빛에 집중하는 매 순간들이 너무나 행복해요. 이 모든 날들과 무대가 제겐 너무 큰 선물입니다.” (박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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