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9일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25 KBO리그 한화 이글스 대 키움 히어로즈의 경기, 7 대 5로 승리해 10연승을 달성한 한화 김경문 감독이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상전벽해(桑田碧海)는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으로 세상일의 변천이 심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푸른 바다'는 그야말로 옛말이고 이젠 '원조 뽕밭'인 서울 잠원동과 잠실의 평(3.3㎡)당 1억원을 호가하는 '초고가 아파트'를 일컬어야 비유가 가슴에 와닿는다.
프로야구에서는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 늘 하위권을 맴돌았던 한화 이글스가 '상전벽해'의 표본이다. 25년간 가을 야구를 딱 네 번 했고 2020~2022시즌엔 3년 연속 10위의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2015년 10구단 체제 이후 3연속 최하위는 한화가 유일하다. 그런 한화가 지난 5월 7일 삼성과의 대전 홈경기에서 10 대 6 역전승을 따내며 20년 만의 9연승, 18년 만의 단독 1위를 쟁취했다. 또 5월 9~11일 키움과의 원정 3연전을 쓸어담으며 33년 만의 12연승이라는 팀 새역사를 창조했다.
한화, 33년 만의 12연승 이끌어
비록 5월 13~15일 3연패를 당해 2위로 떨어졌지만, 한화의 올 시즌 놀라운 대반전의 중심에는 김경문(67) 감독이 있다. 메이저리그(MLB)에서는 감독의 승리 기여도가 5~7%라는 통계가 있다. KBO리그는 MLB보다 역사가 100년 가까이 짧아 전반적인 전력 시스템이 떨어지는 만큼 감독의 역할이 커, 기여도가 10~15%라는 평가가 있다. 그런 점에서 사령탑 경력 16년차 김경문 감독의 능수능란한 지휘력에 힘입어 한화가 수직상승하고 있다는 지적이 설득력 있다.
김 감독이 명장 반열에 오른 건 2008년 베이징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맡아 '사상 첫 야구 우승'을 따내면서다. 7년간 두산 베어스 감독을 지낸 뒤 2013년 NC 다이노스 창단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2018년 팀이 최하위에 머물자 시즌 중인 6월에 중도사퇴했다. 2019년부터 전력이 약한 롯데 자이언츠 등의 차기 감독으로 물망에 올랐으나 부름을 받진 못했다. NC 시절 구단과의 마찰이 그의 꼬리를 계속 밟았다. 구단들이 그를 '너무 무겁게' 여겨 선뜻 영입에 나서지 못한 것.
그러던 차에 한화로부터 지난해 6월 초 '뜨거운 콜'이 왔다. 팀이 초반 상승세를 잇지 못하고 9~10위로 떨어지자 김 감독이 한화 연고지인 공주고 출신이라는 이점이 있는 데다 구단주 측근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전격 발탁됐다. 하지만 어수선한 팀 분위기에다 전력이 워낙 약한 만큼 6년 만에 복귀한 김 감독의 리더십이 발동하지 못해 겨우 8위로 마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올해 김 감독의 뛰어난 지휘력이 발휘되고 있는 것은 NC 퇴임 후 한화 취임까지 6년 공백기간에 쉼없이 야구를 관찰하고 공부한 결과다. 롯데와 LG 감독을 지냈지만 김 감독과의 학연(부산 동성중-고려대 1년 후배)을 바탕으로 '백의종군'하는 양상문(64) 투수 코치, NC 시절 김 감독을 보좌했던 '야구 동기생' 양승관(66) 수석코치의 헌신도 한몫한다.
'대구→부산→충남→서울' 야구 찾아 천리길
그러나 김 감독 '성공 스토리'의 핵심은 인생유전(人生流轉)이다. 그는 1958년 11월 인천 동구 송림동에서 태어났다. 사업을 하던 부친을 따라 대구로 옮겨 옥산초교 3학년으로 전학한 것은 특별할 게 없다. 하지만 4학년 때 반(班)대항 야구경기에서 뛰어난 송구력을 눈여겨본 야구감독이 그를 스카우트하며 '떠돌이 인생'은 시작된다. 자연스레 대구의 경상중으로 진학했으나 1학년을 마치고 가족의 이사에 따라 부산 동성중 야구부로 이적된다. 포수로서 어깨가 좋은 데다 타격 솜씨가 뛰어나 부산고교 진학이 유력시됐다.
그러나 1974년 가을, 공주고 야구부 창단을 앞두고 부산까지 달려와 유망주를 찾던 김영빈 감독의 눈에 띄어 장학생 대우로 난데없는 '충청도행'이 이뤄졌다. 그는 3학년 때인 제11회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1977년)에서 우승 주역으로 MVP를 수상한 덕분에 '야구 명문' 고려대에 진학했다. 어릴 때부터 따지면 '인천→대구→부산→충남→서울'로 정처없는 떠돌이 생활이 이어진 것.
말이 떠돌이지 부모 슬하를 떠나 정서적으로 민감한 성장기에, 거기에다 혹독한 훈련과 주전 경쟁을 치렀다면 자칫 빗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성공한 야구선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난관을 물리치며 '홀로서기'에 집중했다. 심리학자들은 가족품을 떠난 사춘기 소년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성장한다고 한다. 하나는 나쁜 친구와 범죄에 빠지는 비행(非行) 소년이고, 다른 하나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극도의 인내심과 노력에 매진하는 선행(善行) 소년이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넉넉지 못했던 김 감독은 가족 돌봄이 없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앞만 보며 달려, 오늘날 '최고 감독'이라는 훈장을 달고 있는 것이다. 일본 교토시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김성근(83) 감독이 교토 가쓰라 고교 시절까지 '조센징(조선인을 멸시하는 호칭)'이라는 수모를 받으면서도 오로지 '야구 성공'을 위해 꿋꿋이 이겨낸 파란만장한 삶과 어쩌면 비슷하다.
한국시리즈 우승해야 진정한 명장
5월 15일 현재, 시즌 144경기의 약 29.7%밖에 치르지 않아 아직 올해 성적을 속단할 순 없다. 하지만 '선발-중간계투-마무리'의 투수진이 리그 1위로 꼽힐 만큼 탄탄하다는 평가다. 거기에다 수비, 타력의 기복이 없고 역전승 비율이 60% 가까운 끈질긴 투지는 페넌트레이스 우승에 가장 근접한 팀으로 꼽히고 있다.
여기에서 김성근 감독과의 비교는 의미가 있다. 김 감독은 72세인 2014년 10월 한화 사령탑으로 취임했다. 이미 '야신(野神)'으로 추앙받을 때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2015년 6위에 그치고, 이듬해도 시즌 초반부터 6~7위를 오가자 5월 4일 자진사퇴한다. 김경문 감독은 지난해 6월 4일 성적부진의 최원호 감독으로부터 바톤을 이어받아 전년도 10위에서 두 단계 오른 8위로 마무리했다. 올해는 대반전을 이뤄 김성근 감독의 성적을 훌쩍 앞서고 있는 것.
물론 김경문 감독이 '제2의 야신'으로 추대되기 위해서는 올해 반드시 한국시리즈(KS) 우승을 이뤄내야 한다. 한화는 1999년 이후 25년째 '무관(無冠)'에 머무르고 있다. 김경문 감독 개인적으로도 KS 우승이 절실하다. 두산 시절 세 차례, NC 시절 한 차례 준우승에 머문 아픈 과거를 씻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원년 멤버' 출신에 최고령인 김 감독이 올해 성공을 거둔다면 KIA 이범호 감독이 작년 43세에 KS 우승을 따내 야구판에 불었던 '40대 기수론'을 잠재울 수 있다. 류지현(54·전 LG 감독), 김원형(53·전 SSG 감독) 등 '재야의 50대 복귀파'들에게 희망을 던져주고 있는 것.
하여간 대전·충청 지역뿐 아니라 전국의 대전·충청 출신 팬들을 잠 못 이루게 하는 한화 이글스. 전국의 야구 팬들도 올해만큼은 한화가 과연 1위로 시즌을 마칠지를 지켜보며 매일매일이 즐거운 나날이다.
매주 일요일 밤 0시에 랭킹을 초기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