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에서 LG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끈 유기상이 아버지 유영동 NH농협은행 정구부 감독, 어머니, 형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유영동 감독 제공
LG 첫 우승 이끈 유기상, 정구 전설 아빠 유영동에게 물려받은 강심장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5개나 딴 아버지도 가슴이 콩알만큼 작아진 것 같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하나뿐인 우승 트로피를 향해 마지막 승부를 펼치는 모습을 지켜볼 때였습니다. 아들이 숨 막히던 접전 끝에 기어이 승리를 매조진 순간 아버지는 옆에 있던 아내, 큰아들과 함께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프로농구 LG를 창단 28년 만에 첫 우승으로 이끈 유기상(24)과 한국 정구(소프트테니스) 전설인 유영동 NH농협은행 감독(52)입니다.
LG는 17일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최종 7차전에서 SK를 62-58로 누르고 4승 3패로 정상에 올랐습니다. 정규리그 2위 LG는 정규리그에서 역대 최단 기록인 46경기 만에 1위를 확정 지은 SK에 챔프전 1, 2, 3차전을 모두 이기는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1997년 창단 후 처음으로 우승 반지를 차지할 부푼 희망을 키웠지만 LG는 4, 5, 6차전을 모두 패해 초조하게 오히려 쫓기는 처지가 됐습니다.
한국프로농구(KBL)는 물론이고 미국 프로농구(NBA)에서도 챔프전 3연승을 달린 팀이 4연패에 빠져 우승을 내주는 리버스 스윕은 단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LG는 0% 확률의 첫 제물이 된다는 부담감이 컸습니다.
<사진> 정확한 자유투와 끈끈한 수비로 LG 살림꾼 역할을 톡톡히 해낸 유기상. KBL 제공
하지만 LG는 이날 적지에서 치른 7차전에서 경기 내내 우위를 지킨 끝에 그토록 고대하던 우승의 꿈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조상현 LG 감독을 비롯한 선수단 전체가 힘을 합친 결과지만 유기상(12득점, 3가로채기)의 활약도 송골매의 눈을 그려 훨훨 날게 오르게 했다는 평가입니다.
특히 유기상은 경기 막판 시소게임 상황에서 상대 반칙 작전으로 얻은 자유투 4개를 모두 적중시켜 SK의 거센 추격을 잠재울 수 있었습니다. 이날 강심장을 보인 유기상은 성공률 100%로 자유투 7개를 넣었습니다.
유기상(키 188cm)의 아버지 유영동 감독(키 189cm)은 한국 정구의 전설로 불립니다. 정구가 아시안게임 첫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21세의 어린 나이로 복식 금메달을 따낸 것을 시작으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5개나 목에 걸었습니다. 특히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는 3관왕에 올랐습니다.
은퇴 후에는 NH농협은행(은행장 강태영) 정구부를 명문으로 이끌고 있으며 국가대표 감독으로 탄탄한 지도력도 펼쳤습니다. 유기상의 어머니 박영아(키 167cm) 씨도 역시 같은 정구 선수 출신입니다. 박 씨 역시 국가대표로 뛰며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과 1995년 세계선수권 2관왕 등 국제 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려 체육 연금을 받을 정도입니다. 유기상의 70대 할머니는 키가 180cm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진> 용산고 시절 유기상과 아버지 유영동 감독. 채널에이 자료
이런 월등한 DNA를 물려받은 유기상은 서울 삼광초등학교 시절 농구에 입문해 용산중-고와 연세대를 거쳐 LG에 입단해 새로운 유망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올스타전 인기투표에서 1위에 뽑힐 만큼 뜨거운 열성팬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했습니다. 국가대표 시절 유기상을 지도한 안준호 대표팀 감독은 “성실한 스타일이다. 궂은일을 자처할 만큼 희생정신도 뛰어나다”라고 칭찬했습니다.
정구 스타 유영동의 아들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유기상은 이제 달라진 위상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유영동 감독이 ‘기상이 아빠’로 불릴 때가 많다고 합니다. 유 감독은 태국 여행 때 한국에서 온 여행객들이 자신을 보고 “유기상 선수 아버지시죠”라고 물은 적도 있었습니다.
유기상이 프로에서 유명해지면서 정구인들 사이에는 ‘유기상 응원 바람’이 일었습니다. 유영동 감독이 주위를 잘 챙기기로 소문났기 때문에 마치 자기 조카나 아들 일인 것처럼 성원을 보낸 겁니다.
이날 골대 위에서 LG 단체 응원단에게 지급한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열띤 응원을 보낸 유영동 감독은 시상식이 끝난 뒤 유기상, 아내, 고려대에 다니는 큰아들 유진상 군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유 감독은 “기상이가 어릴 때부터 고생하며 운동한 생각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가슴이 벅차오른다”라며 “말로 표현이 안 된다. 내가 금메달 땄을 때보다 더 기쁘다. 기상이가 자기 좋아하는 운동을 하면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는 게 너무 대견스럽다”라고 흐뭇해했습니다. 그러면서 유 감독은 “기상이 4쿼터 마지막 순간에 자유투를 던질 때 아들을 믿고 두 눈 크게 뜨고 응원했다”라며 웃었습니다.
<사진> 1997년 농구단 창단 후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한 LG 선수단이 환호하고 있다. KBL 제공
유기상이 경기 막판 자유투가 흔들렸다면 LG는 우승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유기상은 백보드를 먼저 맞춘 뒤 림을 통과하는 뱅크슛 자유투로 100% 성공률을 올렸습니다. KBL 신해용 사무총장은 “유기상 같은 연세대나 고려대 출신 선수들은 고비에서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배포를 지녔다. 대학 시절 양교의 정기전을 통해 큰 경기 경험을 쌓은 효과인 것 같다”라고 분석했습니다.
유기상은 “아버지가 멀리 창원까지도 응원을 오셨는데 지는 게임을 보여드려 아쉬웠다. 오늘은 꼭 이기고 싶었다. 자유투 던질 때도 긴장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려 했다”라고 소감을 전했습니다.
유기상은 평소 아버지를 통해 강한 정신력을 키웠다고 합니다. 유기상은 “상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는 아빠 마음을 닮고 싶었다”라며 “아빠가 정신적인 면에서 조언을 많이 해주신다. 경기에 지거나 게임이 잘 안 풀릴 때마다 그럴수록 저 집중하는 아빠 말씀을 떠올렸다”라고 전했습니다.
조상현 감독은 선수(2000년·SK)와 코치(2016년 오리온)에 이어 감독으로 우승 헹가래를 받았습니다. 김승기 전 고양 소노 감독과 전희철 SK 감독에 이어 역대 3번째 기록입니다.
마흔 살 허일영은 챔프전 MVP(최우수선수)로 뽑혔습니다. 그는 서로 다른 세 팀에서 선수로 챔피언전 우승을 차지하는 최초의 기록을 썼습니다. 고양 오리온(2016년), 서울 SK(2022년)에 이어 LG에서 세 번째 기쁨을 누렸습니다.
LG는 우승과 함께 짠한 이야깃거리를 쏟아냈습니다. 이렇게 농구 시즌이 끝났습니다.
김종석 채널에이 부국장(전 동아일보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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