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S 연구진,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
세계 최대 박쥐 오가노이드 모델 구축
동물실험 대체, 바이러스X 연구에 활용
코로나바이러스의 숙주인 관박쥐(Rhinolophus ferrumequinum). 국내 연구진이 박쥐 세포로 미니 장기인 오가노이드 4종을 만들었다. 코로나에 이어 팬데믹을 유발할 바이러스를 실험할 수단이 확보된 것이다./Daniel Whitby
사람에게 치명적인 감염병 중 상당수는 박쥐에서 유래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급성중증호흡기증후군(SARS),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등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을 일으킨 바이러스들이 모두 박쥐에서 나왔다. 하지만 박쥐는 실험실에서 다루기 까다로운 야생동물이라, 그 안에 존재하는 바이러스를 실제로 분리하거나 분석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국내 연구진이 감염병 연구의 난제를 해결할 실험 도구를 개발했다. 기초과학연구원(IBS)의 최영기 바이러스기초연구소 소장과 구본경 유전체교정연구단 단장 연구진은 “한국 토종 박쥐의 세포로 미니 장기(臟器)인 오가노이드(organoid)를 만들고, 그 안에서 신종 바이러스를 배양하고 분석했다”고 16일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이날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게재됐다.
◇야생박쥐, 미니 장기로 구현
대전 IBS 본원에서 만난 최 소장은 “최근에는 동물에서 사람으로 넘어오는 인수공통감염병(人獸共通感染病)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며 “그중에서도 박쥐는 팬데믹을 일으킨 주요 병원체들의 숙주로 지목됐다”고 말했다.
박쥐는 몸무게로 따지면 다른 포유류보다 3~10배는 오래 산다. 또 수만 마리가 몸을 맞대고 같은 동굴에 산다. 박쥐가 사는 동굴은 바이러스에게 최적의 배양실인 셈이다. 박쥐에는 137종의 바이러스가 있는데 61종이 사람에 감염된다고 알려졌다. 과학자들은 코로나19에 이어 다시 팬데믹을 유발해 인류를 위협할 이른바 ‘바이러스X’도 박쥐에서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야생박쥐는 잡기 어려워 실험이 쉽지 않았다. 필요한 조직을 충분히 확보하기 어렵고 실험하기도 까다로웠다. 구본경 단장은 “날아다니는 박쥐를 매번 실험에 활용할 수는 없기 때문에 박쥐의 장기를 실험실에서 재현할 시스템이 필요했다”고 했다.
연구진은 오가노이드 기술을 도입했다. 오가노이드는 인체의 모든 세포로 자라는 줄기세포를 장기와 유사한 입체 구조로 배양한 것으로, 미니 장기라고 불린다. 이전에도 사람이나 동물 세포를 실험실에서 배양해 병원균을 키우거나 약물을 실험했다. 오가노이드는 평면 접시에 배양한 세포보다 생체 환경을 더 잘 모사할 수 있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연구진은 다종-다조직 박쥐 오가노이드 플랫폼을 구축했다./IBS
◇박쥐, 바이러스 따라 면역반응 달라
연구진은 국내에 서식하는 박쥐 5종의 세포로 기관지, 폐포, 소장, 신장 오가노이드를 각각 만들고, 박쥐에서 나온 바이러스 10종을 감염시켰다. 박쥐 바이러스를 실험실에서 연구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특히 이번처럼 다양한 박쥐 종과 장기를 아우른 연구는 전례가 없는 규모다. 사이언스가 이번 연구 성과에 주목한 이유다.
실험 결과, 박쥐의 종과 장기, 바이러스 종류에 따라 면역 반응의 강도와 양상이 뚜렷하게 달랐다. 이는 실제 동물의 장기에서 바이러스가 어떻게 퍼지는지, 병원성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최 소장은 “동물 한 마리에서 여러 장기를 연구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라고 평가했다.
야생 박쥐의 분변 시료에서 발견된 변종 바이러스 두 종을 오가노이드에서 배양해 분리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연구의 제1 저자인 김현준 신변종바이러스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은 “일반적인 세포 배양 방식에서는 증식이 어려웠던 바이러스를 살아있는 상태로 배양해 분리할 수 있게 됐다”며 “신변종 바이러스가 등장했을 때 특성을 빠르게 파악하고, 백신 개발 속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연구진이 박쥐 장기 오가노이드를 이용해 신·변종 바이러스를 찾을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연구를 이끈 구본경(왼쪽) IBS 유전체교정 연구단 단장과 최영기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 소장./IBS
◇항바이러스 약물, 백신도 시험 가능
이번 연구의 의의는 단순히 박쥐의 미니 장기에서바이러스를 배양한 데 그치지 않는다. 김현준 연구원은 ”새로운 바이러스의 탐지뿐 아니라, 항바이러스제의 효과 검증, 유전자 기능 연구 등에도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박쥐에서 나온 변종 바이러스에 렘데시비르(Remdesivir) 같은 항바이러스제의 효과를 시험했다. 오가노이드를 이용하면 기존 세포 실험보다 항바이러스제의 감염 억제 효과를 더 정밀하게 볼 수 있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연구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국내 박쥐는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종으로 분류된 경우가 많아 채집 자체가 어렵다. 유전체 정보도 부족해 분석이 쉽지 않았다. 김 연구원은 “참고 유전체가 없어 어려움이 있었지만, 유사 종을 활용한 새로운 분석 기법으로 극복했다”고 말했다.
연구 도구도 일일이 만들었다. 구본경 단장은 “사람이나 생쥐를 위해 개발된 생명공학 도구들이 박쥐에서는 작동하지 않아, 실험 조건을 하나하나 새로 최적화해야 했다”며 “비포장도로를 처음 달리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IBS 연구진 간의 긴밀한 협력 덕분에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구 단장은 “같은 건물 위아래 층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협업하게 됐다”고 했다.
박쥐 오가노이드를 활용한 주요 연구 결과./IBS
연구진은 박쥐 오가노이드를 시작으로 다양한 동물 종으로 오가노이드 실험 범위를 넓히고 있다. 족제비, 닭, 소, 영장류 등 여러 동물의 소장 오가노이드를 구축하고 있고, 장기별 특성을 바탕으로 감염병의 종 간 전파 경로를 분석할 계획이다. 모두 인간과 같은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동물들이다.
구 단장은 “인수공통감염병은 박쥐에서 사람으로 바로 넘어오는 것이 아니라, 중간 숙주를 거치는 경우가 많다”며 “오가노이드를 통해 그 경로를 실험실 안에서 시뮬레이션(모의실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참고 자료
Science(2025),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dt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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