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공동취재) 2025.5.7/뉴스1 ⓒ News1 박지혜 기자
"AI 기업이 당장 돈을 못 버는데 세제 지원이 무슨 소용인가."
(서울=뉴스1) 최동현 기자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지난 9일 정부가 인공지능(AI) 산업에 직접 투자를 할 것을 주문하며 했던 말이다. 세제 지원은 돈을 버는 기업이 내야할 세금을 깎아주는 정책이다. 돈을 벌지 못하는 스타트업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지적한 셈이다.
때가 좋지는 않았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SK텔레콤(SKT)의 유심 해킹 사태로 그룹 전체가 성난 여론의 표적인 상황이었다.
최 회장 본인도 불과 이틀 전 허리를 숙이고 대국민 사과를 했으니, 자신이 어떤 말을 하든 곱게 보이지 않을 것이란 건 잘 알았을 터다. 보통의 재벌 총수라면 입을 닫고 몸은 바짝 낮췄을 법도 한데, 그는 어째서 가장 불편한 시기에 쓴소리를 자처한 것일까.
먼저 '사업가 최태원'의 발자취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는 엔지니어 출신은 아니지만, 블룸버그통신이 '한국의 젠슨 황'이라는 별명을 붙일 만큼이나 재계에서 손꼽히는 AI 애착가로 유명하다. 지난해 SK그룹의 최대 화두였던 사업 구조 개편도, 연례 3대 회의도 중심에는 AI가 있었다.
최 회장이 지난해 샘 올트먼(오픈AI), 사티아 나델라(MS) 등 미국 빅테크 최고경영자(CEO)들과 만난 후 "AI라는 거대한 흐름의 심장 박동이 뛰는 이곳에서 전례 없는 기회들이 눈에 보인다. 지금 뛰어들거나, 영원히 도태되거나"라고 남긴 소회에는 그가 느꼈을 조바심이 묻어났다.
정부가 뒤늦게 'AI 민관 원팀' 깃발을 들었다지만, 한국의 AI 예산은 민망한 수준이다. 정부는 올해 AI 예산을 1조 8000억 원 편성했다가 지난달 추가 경정(1.8조)을 더 해 총 3조 6000억 원을 배정했다. 예산을 두 배 늘린 '대규모 투자'라고 자화자찬했지만, 미국의 200억 달러(약 28조 원), 중국의 1917억 위안(약 38조 원)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예산뿐만이 아니다. 미국 실리콘밸리는 지난 한 해만 1100억 달러(약 162조 원)의 민간 투자금을 빨아들였고, 중국은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교육을 받은 '이공계 군단'을 350만 명 넘게 보유하고 있다. 매년 졸업장을 받는 기계공학과 출신 엔지니어만 35만 명으로, 작년 우리나라 신생아 수(25만 명)보다도 많다.
AI 산업은 누가 더 먼저 인프라를 깔고 더 많은 인재를 모으느냐가 패권을 좌우하는 독과점 시장이다.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를 제치고 '세계 D램 1등'을 꿰찬 것도 HBM의 가능성을 한발 먼저 알아봤던 덕이다. 실리콘밸리에서 미국 AI 생태계의 초격차를 생생하게 봤을 최 회장이 "AI 없이는 우리나라 경제모델 자체가 부서질 수 있다"고 경고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와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대선을 3주 앞두고 이구동성으로 'AI 투자 100조 원 시대'를 공약했다. 민관 투자금을 영끌해도 5조 원 남짓인 현재보다는 괄목할 발전이지만, 2000년대 'IT 강국' 브랜드만큼이나 AI에서도 한국의 위상을 보장할 수준인지는 의문이다.
다시 최 회장의 발언으로 돌아오자. 세제 지원보다 직접 투자를 더 좋아하는 기업의 특성이야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최 회장이 따가운 여론을 무릅쓰고 '쓴소리'를 해야 했던 이유는 주목해야 한다. SKT에 대한 감정을 잠시 내려놓고, AI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으려면 '더 과감한 결단'을 해야 한다는 그의 진심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dongchoi89@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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