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종기원 공공테스트베드
벤처에 수백억원 장비 지원
설계도만 있으면 반도체 제조
혁신 스타트업 데스밸리 넘겨
소부장 핵심부품 21개 국산화

나노종합기술원 반도체 클린룸에서 연구진들이 반도체 제조 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나노종합기술원]

삼성전자에서 디스플레이 개발자로 일하던 김재균 대표는 2019년 디스플레이 제조업체 어드밴스트뷰테크널러지를 창업했다. 반도체 설계 노하우를 바탕으로 1년에 걸쳐 제품 설계도를 완성했지만, 시제품을 만들 방법이 없었다. 대기업과 미팅이라도 하고 투자를 유치하려면 시제품이 필요했지만 창업 1년차 스타트업에게는 꿈 같은 일이었다.

반도체는 설계도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노광과 증착, 도핑 등 8단계 이상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매 공정에 비싼 제조 장비가 필요하다. 삼성전자나 TSMC에서 말하는 나노 공정을 결정하는 것 역시 이 같은 제조 장비의 역할이 크다. 수백 억 원을 호가하는 고가의 장비이기 때문에 벤처와 중소기업들은 엄두조차 낼 수 없다.

실제로 제조해보면서 설계도를 수정하는 과정도 필수적이다. 때문에 제품 개발에서 양산까지는 대체로 5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스타트업들에게는 ‘죽음의 계곡(데스밸리)’인 셈이다. 수많은 혁신 벤처들이 기술력을 보유하고도 데스밸리를 넘지 못해 스러진다. 김 대표도 똑같은 고민을 하다가 나노종합기술원(나노종기원)에서 데스밸리를 넘어설 방법을 찾았다.

나노종기원은 ‘반도체 공공 테스트베드’를 구축해 2021년부터 중소기업의 반도체 제조의 전체 과정을 지원하고 있다. 2005년부터 반도체 제조를 지원해왔던 종기원은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를 계기로 12인치 반도체 제조 장비를 들여오고, 중소기업들과 공동연구사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대기업에서 요구하는 스펙에 맞게 시장성 있는 반도체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중소기업이 구매하기 힘든 고가의 제조장비들을 나노종기원에 구축한 덕분에, 국내 업체들은 합리적인 가격으로 반도체 시제품과 양산 기술을 개발할 수 있게 됐다. 그 이전에는 해외에 있는 제조업체에 맡겨야 했는데, 비용이 비싸고 회사가 원하는 반도체를 만들기 어려웠다.

김 대표는 “반도체를 만들려고 하는 중소기업에게는 사실상 나노종기원이 유일한 기회다. 나노종기원 시설이 없으면 시제품과 양산화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면서 “덕분에 ‘데스밸리’를 무사히 넘기고 시장에 선보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분야 대기업들도 반도체 제조 설비를 가지고 있으나, 자체 공정과 보안 문제 때문에 외부 업체와 공유하지 않는다.

나노종기원은 국내 최초로 12인치 반도체 공공 테스트베드를 구축한 후,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공공기관 중 유일하게 8인치와 12인치 양산장비와 평가공정을 모두 보유한 실증 플랫폼이 됐다. 현재는 8인치 공정장비 200대, 12인치 공정장비 16대 등 반도체 제조와 관련된 장비가 총 380여 대 구비되어 있다. 반도체 설계도를 가지고 있는 중소기업들은 나노종기원의 설비를 이용해 자신들만의 반도체 제품을 생산해볼 수 있다.

어드밴스트뷰테크널러지도 2021년부터 나노종기원 설비를 이용하기 시작해 3년에 걸쳐 시제품을 제작했고, 지난해 자사의 설계도로 만든 반도체를 손에 넣었다. 설계도를 갖고도 3년이 걸린 것은 제조 과정에서 설계도를 계속해서 보완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나노종기원과 공동연구를 추진해 반도체의 성능을 끌어올렸다.

데스밸리를 넘어서는 여정은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양산화까지 갈려면 더 많은 연구개발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이번 시제품을 더 연구해서 양산화 기술을 확보하기까지 2~3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나노종기원의 시설을 사용할 예정이다.

반도체 캐패시터 제조업체인 ‘엘스페스’도 나노종기원 플랫폼을 이용해 시제품을 개발했다. 박영열 엘스페스 대표는 “이 분야에서 완성된 반도체가 있고 없고는 엄청난 차이인데, 시제품을 만든 덕에 우리 제품에 대한 신뢰도가 올라갈 수 있었다 ”고 말했다. 2020년 설립한 이 회사는 벌써 미국 플로리다주에 6000억 원 이상을 들여 연구 시설을 짓고 미국 시장 공략에 나섰다.

이들 외에도 나노종기원으로 데스밸리를 넘어선 기업들은 많다. 종기원 측에 따르면, 지난 4년간 40개 품목의 시제품을 제작했으며 반도체 소부장 분야에서 21개 핵심 품목의 국산화에 성공했다. 업체들은 나노종기원 설비를 활용해 매출 785억 원, 투자유치 582억 원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했다. 나노종기원에서 만든 반도체를 바탕으로 업체 2곳이 기업공개에 성공했으며, 84개의 일자리 창출된 것으로 추산된다.

박흥수 나노종기원장은 “국내 반도체와 전략기술 응용분야의 글로벌 초격차를 견인하기 위해 앞으로도 연구자 중심의 개방형 플랫폼과 양산 실증 기반을 강화하여, R&D 생태계와 산업을 연결하는 혁신적 거점기관으로서 역할을 공고히 하겠다”고 밝혔다.

김재균 어드벤스드뷰테크널러지 대표(오른쪽)가 작년 미국 기술박람회에서 자사의 제품을 소개하고 있다. 이 회사는 나노종기원 공공 테스트베드를 활용해 ‘데스밸리’를 넘고 글로벌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어드벤스드뷰테크널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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