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보는 아재] 주원-진세연 주연의 KBS 드라마 각시탈>
[양형석 기자]
타고난 '관종' 토니 스타크처럼 영화가 끝나기 전 마지막 몇 초를 참지 못하고 기자 회견장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히어로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히어로는 세상에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자신이 히어로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본캐'로서 평범한 삶이 무너질 뿐 아니라 악당들이 언제든지 자신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히어로들이 기를 쓰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이유다.
물론 안경 벗고 바지 위에 속옷 입는 걸로 변신이 끝나는 슈퍼맨 같은 히어로도 있지만 많은 히어로들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가면을 즐겨 사용한다.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에서는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 분)가 레슬링 대회 출전을 앞두고 가면을 직접 디자인하는 장면이 나오고 <배트맨 비긴즈>에서는 브루스 웨인(크리스찬 베일 분)이 중국 공장에 박쥐 가면 1만개를 주문했다.
지난 2012년 허영만 작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만든 이 드라마는 일제 강점기에 활약했던 '한국형 히어로'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캐릭터 역시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들을 위해 싸우는 히어로라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고 활동하는데 그가 활용한 아이템은 다름 아닌 전통의 '탈'이었다. 신예 위주의 캐스팅에도 30%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하며 큰 사랑을 받았던 KBS 드라마 <각시탈>이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만든 드라마
![]() |
▲ 각시탈을 쓰고 태극기를 든 민중들의 봉기는 많은 시청자들을 감동 시킨 <각시탈>의 멋진 엔딩이었다. |
ⓒ KBS 화면 캡처 |
한국은 크게 고조선을 시작으로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4300년이 넘는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광복이 되기 전, 우리 민족은 일제 강점기라는 36년의 가슴 아픈 역사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는 한국의 긴 역사에서 매우 짧은 기간이지만 워낙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에 광복 8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여러 드라마에서 많이 다뤄지고 있다.
1991년부터 1992년 초까지 방영된 MBC 수목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는 3명의 주인공이 일제 강점기에서 시작해 해방 이후의 혼란기를 거쳐 6.25 전쟁까지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이야기를 다룬 시대극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여명의 눈동자> 초반 일제 강점기를 다룬 부분에서는 조선인 강제 징용과 일명 '마루타'로 불린 생체 실험, 위안부 등을 생생하게 다루면서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일대기를 그리며 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드라마 <야인시대>는 124부작이라는 긴 분량이 말해주듯 일제 강점기부터 대한민국의 제3공화국 시절까지 긴 세월을 다룬 작품이다. 그 중 안재모가 김두한의 청년 시절을 연기했던 일제 강점기 시절은 시청률 4~50%를 넘나들며 큰 인기를 끌었다. 전체 분량의 40% 정도지만 <야인시대>가 대표적인 일제 강점기 드라마로 기억되는 이유다.
2007년에 방영한 한지민, 강지환 주연의 KBS 드라마 <경성스캔들>은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했던 시대의 항일투쟁을 발랄하고 유쾌하게 풀어낸 드라마였다. <경성스캔들>은 동 시간대에 박신양의 <쩐의 전쟁>과 맞붙으면서 썩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진 못했다. 하지만 온라인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DVD가 발매돼 완판 되는 이변을 일으켰고 한지민은 2007년 KBS 연기대상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2015년 김향기와 고 김새론이 출연했던 KBS의 광복 70주년 2부작 특집 드라마 <눈길>은 일제 강점기 두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위안부의 실상을 고발한 드라마였다. <눈길>은 방영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향기와 김새론의 열연이 돋보였던 작품으로 2016년 6월 캐나다 반프에서 개최된 월드미디어페스티벌에서 TV영화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눈길>은 2017년 새로 편집한 극장판이 개봉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었던 신예 캐스팅이 '신의 한 수'
![]() |
▲ 신인 시절의 박보검이 연기한 나약한 소년병 민규는 동진결사대의 전면에 서서 드라마의 엔딩을 장식했다. |
ⓒ KBS 화면 캡처 |
<각시탈>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과 항일정신을 주제로 한 드라마다. 이 때문에 일본에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던 '한류스타'들이 <각시탈> 출연에 난색을 표했고 결국 뮤지컬 배우 출신으로 매체 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예 주원에게 주인공 이강토 역할이 돌아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강토 역 캐스팅은 드라마에도, 주원에게도 최고의 선택이 됐다.
<각시탈>은 허영만 작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원작을 충실히 따라가기 보다는 여러 히얼로물의 설정들이 더해지며 캐릭터가 완성됐다. 거대 권력을 가진 이들에 의해 가족을 잃고 원수를 갚으려 하는 설정은 이준기 주연의 SBS 드라마 <일지매>와 비슷하다. 또한 초대 히어로가 죽고 2대가 뒤를 잇는다는 설정은 안토니오 반데라스 주연의 영화 <마스크 오브 조로>를 떠올리게 한다.
<각시탈>에는 일제 강점기 배경의 항일 드라마답게 애국적인 요소나 일본의 악행을 다룬 장면이 많이 등장했다. 19회에는 각시탈이 욱일기를 반으로 베어버리는 장면이 나왔고 20회에는 위안부의 이야기가 꽤나 구체적으로 다뤄지기도 했다. 일본 현지에서도 반응이 엇갈렸는데 일본의 젊은 한류팬들은 <각시탈>을 한국의 '대체역사 판타지' 정도로 받아 들였고 주원도 일본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24부작으로 기획됐던 <각시탈>은 높은 인기에 힘입어 4회 연장을 단행했는데 역시 무리한 연장은 작품의 완성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실제로 <각시탈>은연장 후 이강토(주원 분)와 목단(진세연 분)의 러브라인 비중이 급격히 늘어났다. 다만 동진결사대를 선두로 각시탈을 쓴 민중의 무리들이 종로경찰서로 향하는 <각시탈>의 엔딩은 시청자들을 감동 시키기 충분했다.
<그린 로즈>와 <신의 저울>, <즐거운 나의 집> 등을 집필했던 유현미 작가는 <각시탈>을 통해 처음으로 시대극에 도전했다. 초반에는 독립 운동가들을 답답하게 표현하고 일본인 캐릭터에 서사를 부여하면서 '친일 미화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지만 드라마가 전개될수록 이야기에 입체감이 더해지면서 호평을 받았다. 유현미 작가는 6년 후 <SKY캐슬>을 통해 대한민국 콘텐츠대상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각시탈>에 나오는 '관식이'와 '학씨 아저씨'
![]() |
▲ <각시탈>은 신인에 가까웠던 배우들이 주연을 맡았음에도 30% 가까운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
ⓒ <각시탈> 홈페이지 |
이강토 역의 주원도 신예에 가까웠지만 여주인공 오목단 역의 진세연 역시 2011년 일일드라마 <내 딸 꽃님이>를 통해 갓 주연 신고식을 마친 신예였다. 목단은 일본경찰 이강토를 원수처럼 미워하지만 자신을 여러 번 구해준 각시탈에게 호감을 느끼는 전형적인 히어로물의 여주인공이다. 그리고 많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목단은 이강토와의 결혼식에서 총에 맞아 이강토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선역과 악역을 오가는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박기웅은 <각시탈>에서 일본 제국경찰의 경부 기무라 슌지를 연기했다. 슌지는 이강토와 절친인 소학교 교사였지만 각시탈과의 악연 이후 제국 경찰로 흑화 한다. 하지만 이강토를 노리고 쏜 총이 짝사랑하던 오목단을 죽음에 이르게 하면서 살아갈 이유를 잃은 슌지는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맨발의 기봉이> 이후 출연하는 작품마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예능인 이미지가 커지던 신현준은 <각시탈>에서 이강산 역을 맡으며 오랜만에 배우로서 존재감을 뽐냈다. 신현준이 연기한 이강토의 형 이강산은 동네 바보로 위장한 초대 각시탈로 어머니를 죽인 기무라 켄지(박주형 분)를 처단하려는 순간, 동생이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다.
신인 시절의 박보검은 일본군에 강제 징집 될 뻔 했다가 조선의 독립 운동단체 동진결사대에 합류하는 함민규를 연기했다. 나약한 소년이었던 민규는 엔딩 장면에서 종로 경찰서 돌격의 선봉에 섰다. <폭싹 속았수다>의 '학씨 아저씨'로 전성기를 연 최대훈은 이강토와 기무라 슌지의 친구이자 친일파의 아들 이해석 역을 맡아 매국노의 가족으로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인물의 고뇌를 연기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주 일요일 밤 0시에 랭킹을 초기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