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 규제에 갇힌 K-AI (상)
[편집자주] IT 강국이었던 대한민국이 AI 주변국으로 밀려났다. IT 강국을 이끌던 플랫폼 기업들은 하나둘 글로벌 빅테크에 안방 자리를 내준다. 위기다. 지금은 규제보다 산업 진흥에 나서야 할 때다. AI 성숙도 2군 국가에서 강국으로 다시 올라서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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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에 활개치는 K-규제, 혁신 막고 관세 빌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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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국의 민간 AI 투자규모/그래픽=최헌정
"용납할 수 없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후보자 시절이던 지난 2월 6일(현지시각) 미국 상원 재무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유럽연합(EU)과 한국 등이 미국 기술기업들을 겨냥한 특별 요구나 과세 조치를 추진하려고 기회를 활용한다"는 마이클 크레이포 상원의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한국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해 발표한 플랫폼경쟁촉진법안(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대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다.
해당 법안은 지배적 플랫폼 사업자를 규율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으로 구글과 메타 등 글로벌 업체뿐 아니라 네이버(NAVER)와 카카오 등 국내 플랫폼 업체까지 표적으로 삼고 있다. 산업혁명 시대에 독과점의 부작용을 막기 위한 정책을 AI(인공지능) 기업들에까지 무리하게 적용하려는 당국의 행보가 국내 업체의 혁신을 저해하는 것을 넘어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 통상 및 관세 교섭 과정에서 트집거리로 작용한 것이다.
실제로 'IT 강국'으로 세계를 선도했던 대한민국이 AI 시대에서는 기술·특허 규모는 물론 인재 유입이나 투자 등 각종 지표에서 약소국을 벗어나지 못한 배경으로 제조업 시대의 낡은 규제와 노동환경이 한몫을 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가 지난달 준공한 미국 생산 거점인 조지아주 '현대자동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에는 용접과 조립, 도장, 품질검사, 이송까지 로봇이 담당한다. 연간 자동차 10만대를 생산하는데 노동자는 880명에 불과하다. 울산공장과 비교하면 생산량당 필요 인력이 3분의 1 수준이다. 현대차는 세계 최고 수준의 로봇 기술을 보유한 보스턴다이내믹스에서 생산한 로봇을 공장에 대거 투입했다.
국내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앞서 기아자동차는 2018년 노후한 경기 광명시 소하리 공장을 250억원을 들여 자동화하려 했지만 노조가 반대해 계획을 접었다. AI와 로봇을 대거 생산 현장에 적용해 생산비용을 줄이고 경쟁력을 높이려는 시도가 국내가 아닌 미국에서 개시된 점은 뼈아프다. 제조업 현장에 최적화된 52시간 근로제를 AI 등 혁신기술 산업에까지 일률적으로 적용하려고만 할 뿐 정작 AI 확산 후 변화할 노사관계를 어떻게 조율할지에 대한 밑그림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AI 기술 개발을 위해서는 대규모 투자도 필수적이다. 차세대 AI 모델 개발에는 약 1억 달러(1390억원)∼10억 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업계는 추산한다. 미래에는 1000억 달러(약 139조 원)를 초과할 가능성도 있다. AI 플랫폼 개발에 요구되는 비용도 막대하다.
AI 시장에서는 데이터와 인재 확보, 시장 점유 경쟁이 격화되고 있다.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진 국내 AI 업계의 상황을 고려할 때 한국이 미국, 중국을 따라잡기 위해 관련 기업 간의 상호협력과 대대적인 투자,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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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굴뚝 산업시대'?…혁신 가로막는 규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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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기본법 개요/그래픽=윤선정
"주변에 네이버 AI(인공지능)를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챗GPT가 시장을 선점했다. 제대로 된 성장 동력을 제시해달라."
지난달 26일 네이버(NAVER) 주주총회장에서 한 주주가 던진 날카로운 질문은 네이버를 비롯한 국내 IT업계에 비수가 돼 꽂혔다. 미·중 간 AI 패권 경쟁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과거 'IT 강국'으로 불렸던 한국은 설 자리가 좁아진 탓이다.
최근 발표된 스탠퍼드대 인간중심AI연구소(HAI)의 2025년 AI 인덱스 보고서에서 주목할 만한 한국 AI는 LG엑사원 3.5, 단 1개 뿐이었다. 미국은 40개, 중국은 15개, 프랑스는 3개인 것과 대조된다. 지난해 말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73개국을 대상으로 평가한 'AI 성숙도 매트릭스' 보고서에서는 한국이 미국, 중국, 캐나다, 영국, 싱가포르에 밀린 2군 국가로 평가됐다.
◆ 국가대표 AI는 없는데 AI 규제는 세계 최초
주목할 AI는 적은데, 규제는 발빠르다. 'AI 기본법'(인공지능 발전 및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이 지난해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구성한 하위법령 정비단이 6~7월쯤 시행령을 마련하면 내년 1월부터 본격 시행된다. 세계 최초의 AI 법안인 EU의 AI 법(AI ACT) 시행이 내년 8월인데, 한국이 그보다 7개월 빠르다. 공진호 과기정통부 AI 정책과장은 "현재 AI 기본법 하위법령 초안을 마련해 업계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고 있다"면서 "시간을 두고 업계 입장을 충분히 반영해 시행령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법안은 '사람의 생명, 신체 안전, 기본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AI를 '고영향(고위험) AI'로 정의해 규제를 시행하는 내용이 골자다. 의료 진단 AI, 채용 평가 AI 등이 예로 꼽힌다. 또 AI 저작물에 워터마크를 찍어 표시하고, AI가 기본권을 침해할 경우 3000만원 가량의 과징금을 물리는 방안 등이 포함돼 있다.
IT 업계 전문가들은 아직 걸음마 단계인 한국 AI 산업에 규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규제 대상인 '고영향 AI'에 대한 정의도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설익은 규제로 인해 한국 AI 산업이 도태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고영향 AI' 기준이 애매하다. 각 정부 부처가 업무에 AI를 도입하면 사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모두 규제할 건가"라고 반문하며 "실제 위험이 있거나 AI가 전체적으로 보급된 것도 아닌데 가상 현실을 가정해 입법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라고 일침했다.
◆ 고소득 연구진에도 적용되는 주52시간 근무…4차 혁명 걸림돌
주 52시간 근무제 역시 AI 산업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과거 '블루 컬러' 노동자들이 밤낮 없는 열악한 근무 행태에 고통받았던 '굴뚝산업' 시절에나 적법한 규제라는 지적이다. 현재는 연구개발(R&D)을 통한 AI·빅데이터 등 ICT(정보통신) 기술 변화가 사회를 바꾼다.
R&D 업무 특성 상 초기 집중 연구가 필요하지만, 주52시간 근무를 지켜야 하는 탓에 연구자들은 짐을 싸들고 귀가해 일을 하거나, 근무하고도 쉬었다는 '이중장부'를 적어내는 일이 빈번하다. 일정 소득 이상의 근로자들이나, 집중 근무가 필요한 연구직 등 업의 특성에 따라 근로 형태를 유연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세계 1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회사인 대만 TSMC는 불이 안 꺼지는 연구소로 유명하고,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중국의 AI '딥시크' 역시 빠른 성장 비결 중 하나로 유연한 근로정책이 언급된다. 국민의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은 지난달 '딥시크' 보고서에서 "AI 연구개발 특성상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즉시 실험하고 결과를 확인하는 연속성이 중요한데 현행 주 52시간제 하에서는 유연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며 "AI와 같은 첨단기술연구 분야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스마트한 예외'를 적용하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이성엽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반도체 인력도, AI 개발 인력도 주 52시간 근무 제한을 두는 것이 초기 연구에 방해가 될 수 있다"면서 "규제 샌드박스 등 예외를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황국상 기자 gshwang@mt.co.kr 김소연 기자 nicks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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