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 9단, 올해 23승4패, 승률 85.2% 질주
‘에이징 커브’ 시점인 30대 중반 ‘역주행’ 주목
베테랑 선전은 긍정적…세대교체 지연 염려도
세상 떠난 부친께 세계 메이저 기전 우승 약속지난 11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만난 이지현 9단은 최근 ‘제26기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에서 세계 랭킹 1위인 신진서 9단을 꺾고 우승컵까지 차지한 소감을 묻는 질문에 "운이 좋았을 뿐이다"라며 "아직도 보완해야 될 부분이 너무 많다"라고 말했다. 남동균 인턴기자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인터뷰 내내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모든 바둑 기사들에게 출전 자격을 부여한 국내외 종합 대회가 아닌 속기 제한 기전 성적이란 설명까지 곁들이면서다. 7일 막을 내린 ‘제26기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에서 우승한 이지현(33) 9단이 밝힌 냉정한 타이틀 획득 소감이다. 지난 11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만난 이 9단은 오히려 “아직도 보완해야 될 부분이 너무 많다”라며 자신에겐 인색한 잣대를 들이댔다.
보수적인 본인 평가와 달리, 이 9단은 요즘 국내 바둑계의 가장 ‘뜨거운 감자’다. 입신(入神·프로 9단 별칭)들만 참가, 속기(제한시간 10분, 추가시간 30초) 방식으로 진행된 이번 ‘26기 맥심배’ 결승전(3판2선승제·3번기)에서 2승1패로 물리친 상대가 다름 아닌 현재 세계 랭킹 1위인 신진서(25) 9단이다. 천하의 신 9단이 3번기 이상으로 짜여진 국내 타이틀 매치에서 패하긴 2022년 이후 처음이다. 이 9단은 신 9단과 통산 상대전적에서 아직까진 5승12패로 열세이지만 최근 4번의 맞대결에선 3승1패로 앞설 만큼, 물오른 기세를 뽐내고 있다. 연초부터 최다인 18연승 행진 기록을 작성했던 이 9단의 올해 현재(15일 기준)까지 전적은 23승4패(승률 85.2%)로, 다승 부문에서 신진서(26승4패) 9단의 뒤를 이어 2위에 랭크됐다. 덕분에 이 9단의 월간 국내 프로 랭킹(4월 기준) 역시 자신의 최고치인 4위까지 급상승했다. 그동안 실력에 비해 큰 무대에서 부진했던 모습도 개선된 양상이다. 이 9단은 지난해 9월 열렸던 세계 메이저 기전인 ‘제29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에선 중국 초일류 기사인 딩하오(25) 9단과 판팅위(29) 9단 등에게 연거푸 승리, 생애 첫 4강에 진출하면서 국제 무대에서의 경쟁력도 입증했다.이지현(왼쪽) 9단이 지난해 12월 경기 성남시 SG타워 K바둑 스튜디오에서 열렸던 '제47기 SG배 한국일보 명인전' 결승 2국에서 박정환 9단과 대국을 벌이고 있다. 앞선 1국에 이어 2국까지 박 9단에게 패한 이 9단은 당시 3판2선승제(3번기)로 진행됐던 '제47기 명인전' 우승컵을 박 9단에게 내줬다. 성남=류기찬 인턴기자
무엇보다 이런 성과를 그동안 국내외 바둑계에선 본격적인 ‘에이징커브’(시간의 흐름에 따른 기량 저하) 시점으로 여겨졌던 30대 중반 무렵, 일궈냈단 측면에서 이 9단의 진가는 더해졌다. 이에 대해 이 9단은 아팠던 만큼 더 강해진 것 같다고 돌아봤다. “지난해 말, 아쉬웠던 ‘제47기 SG배 한국일보 명인전’ 준우승이 보약이었나 봅니다. 빠른 시간 내에 우승컵을 들어올리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는데, 그래도 더 늦지 않게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생애 첫 종합 기전 우승컵 획득 기회를 코앞에 두고 놓쳤던 뼈아픈 경험이 이 9단 상승세의 원동력으로 자리했단 얘기였다.
이 9단은 대세인 인공지능(AI)에 대한 예찬론도 펼쳤다. “AI가 바둑계에 끼친 영향에 대해선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좋은 쪽으로 활용을 했으면 합니다. AI 능력치가 사람보다 더 뛰어나다는 게 확인된 만큼, 인간 바둑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적절하게 AI를 잘 이용해야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변화된 반상(盤上) 흐름에 맞게 대응하는 것도 바둑 기사들에겐 중요하거든요.” AI가 이 9단의 기력 향상엔 특급 도우미였단 뉘앙스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갈 길은 멀다고 했다. “대국 도중 유리한 바둑을 끝까지 가져가는 능력이라든가, 불리한 상황에서 역전의 돌파구를 찾아내는 감각은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대국 도중, 정밀한 형세 판단 능력에도 문제가 있어요. 끝없이 돌아보고 보완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 무대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초일류 기사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셀프 객관화’라고 생각합니다.” 공개적으로 본인 약점 공개가 쉽지 않았을 법도 했지만 정확한 자가 진단 없인 자체 경쟁력 강화 또한 요원할 것이란 그의 냉철한 신념 역시 확고했다.지난 11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만난 이지현 9단이 최근 ‘제26기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에서 세계 랭킹 1위인 신진서 9단과 가진 결승 3국을 복기하고 있다. 이 9단은 3판2선승제(3번기)로 진행된 ‘제26기 맥심배’에서 신 9단에게 2승1패로 승리, 우승컵을 차지했다. 남동균 인턴기자
국내 바둑계로 화제를 돌린 그는 베테랑 기사들의 선전과 관련해선 엇갈린 심정도 내비쳤다. “예전 같았으면 내리막길에 들어섰다고 평가 받았던 30, 40대 프로 바둑 기사들이 현재 국내 프로 랭킹 10위 안에 진입해 있다는 게 바둑팬들에겐 색다른 볼거리일 수 있습니다만, 다른 측면에선 10, 20대 어린 선수들의 성장 속도가 느리다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속엔 현역 선수들의 수명 연장에 대한 고무적인 시각과 세대교체 지연으로 인한 염려가 교차된 듯했다. 한국기원에 따르면 올해 4월 기준, 국내 프로 바둑 랭킹 ‘톱10’ 내엔 4위에 오른 이 9단 이외에도 박정환(32·2위) 9단과 강동윤(36·3위) 9단, 원성진(40·8위) 9단, 안성준(34·9위) 9단, 김정현(34·10위) 9단 등이 마크된 상태다. 그래서였을까. 조심스럽게 후배들에 대한 당부도 빼놓지 않았다. “(제가) 누군가에게 조언까지 할 위치나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보다 확실한 목표의식과 치열함을 가지고 꾸준하게 노력하는 후배들의 모습을 더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결국, 10, 20대 기사들이 앞으로 한국 바둑계를 이끌어갈 주역이니까요. 그게 프로의 세계에선 기본이기도 합니다.”
이 9단은 바둑계 안팎의 상황과 무관하게 자신에겐 ‘역주행’을 이어가야만 할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고 했다. 4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친에 대한 기억에서다. “아버지는 굉장히 엄격하셨지만 어릴 때부터 제 진로를 찾아주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많은 노력을 하셨어요.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바둑 기사로 성장하게 된 것은 아버지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이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세계 메이저 기전 우승컵으로 제가 보답할 차례입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의지를 엿보인 이 9단의 얼굴에선 강한 집념이 묻어났다.
매주 일요일 밤 0시에 랭킹을 초기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