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 관세 전쟁 불똥 튀어
그래픽=양인성
15일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엔비디아의 저사양 인공지능(AI) 가속기인 ‘H20’의 대중(對中) 수출을 무기한 규제하기로 했다. 미국의 관세 공세에 중국이 맞대응하며 버티자, 트럼프 정부는 핵심 AI 반도체 수출 통제로 대중 압박 수위를 한층 높인 것이다.
AI 가속기는 AI의 연산 속도를 빠르게 하는 반도체로, 그래픽처리장치(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을 조립해 만든다.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핵심 AI 반도체로, 엔비디아가 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이번에 수출 통제 대상이 된 ‘H20’은 최첨단 AI 가속기 수출이 전면 금지된 중국 시장을 겨냥해 엔비디아가 특별히 제작한 것이다.
AI 반도체를 둘러싼 미·중 대립은 한국 반도체로 불똥이 튀고 있다. H20에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HBM이 들어가는데, H20의 대중 수출이 중단되면 타격이 불가피하다. 국내 반도체 업계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전쟁으로 글로벌 데이터센터 투자가 줄어들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H20 수출까지 사실상 중단되면서 한국 메모리 반도체도 덩달아 타격을 받게 됐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래픽=양인성
◇미·중 관세 전쟁 불똥 튄 韓 반도체
15일 엔비디아는 “미 정부가 H20을 중국에 수출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통보해 왔다”고 밝혔다. 앞서 미 당국은 H20의 대중 수출을 허용할 것처럼 언급했지만, 최종 규제 대상에 포함하기로 했다. H20 수출이 막히면 엔비디아는 지난 1분기(회계 기준 2~4월) 실적에 55억달러(약 7조6000억원)의 손실을 반영해야 한다. 수출을 위해 미리 제작한 물량이 재고로 남기 때문이다.
H20 재고는 한국 반도체에 큰 부담이다. 엔비디아는 지난해 중국에 H20 약 100만개를 수출했다. 금액으로 120억~150억달러(약 17조~21조원)로 추정된다. 올해는 1분기에만 130만개를 수출할 것으로 예상됐다. 올 초 중국의 저비용 고성능 AI ‘딥시크’가 H20으로 AI를 훈련했다는 사실이 공개되고, 반도체 규제가 예상되며 주문량이 급증했다. H20 1장에는 HBM 6개가 탑재되는데, 거의 대부분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공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H20 수출 제한으로 지난 1분기에만 약 800만개의 HBM 매출이 영향을 받는 것이다. 금액으로는 대략 16억달러(약 2조2000억원)로 추산된다. 삼성전자는 ‘H100’ ‘블랙웰’ 등 엔비디아 최첨단 AI 가속기에 HBM을 납품하고 있지 않지만, H20에는 들어간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중 관세 전쟁으로 엔비디아 제품의 중국 수출이 계속 막히면, 고부가 제품인 한국 HBM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전 세계 HBM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점유율은 94.9%로 압도적이다.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도 악영향
미국에 대한 보복 조치로 중국이 중희토류 7종의 수출을 통제하기로 한 것도 한국 기업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중희토류는 AI 서버와 스마트폰 전원 공급 장치의 핵심 재료로도 쓰이며, 전 세계 중희토류 공급량의 99%를 중국이 생산하고 있다. 중국의 조치는 미국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에는 당장 영향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세계 AI 반도체 공급망 속에서 희토류로 인한 부품 조달 문제가 생기면, 한국 기업들도 타격을 피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국내 기업들도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트럼프가 예고한 반도체 관세율이 얼마로 결정될지도 관심이다. 높은 관세율이 부과되면, 반도체가 들어가는 AI 서버 등 제품 값이 올라 기업들의 투자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엔비디아가 관세 전쟁을 피하기 위해 미국에서 구축하기로 한 ‘AI 반도체 생산 인프라’도 한국 기업에는 큰 부담이다. 엔비디아가 파트너로 선택한 기업들이 TSMC·폭스콘 등 대부분 대만 기업이기 때문이다. 엔비디아와 TSMC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미국 내 AI 반도체 생태계에 한국 기업이 파고들 여지가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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