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상군 해녀 박충수 역의 배우 차미경
가마골소극장 1호 배우로 시작한 '40년 연기 인생'
아이유·김다미·신민아에 이어 박보영·안은진과 호흡 "여주인공 복이 있는 것 같아요"
차미경이 본지와 단독 인터뷰를 진행했다. 디퍼런트컴퍼니 제공
우리는 어린 날엔 막연히 꿈을 좇고, 젊은 날엔 역경을 딛고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인생이라는 한 편의 이야기를 완성하게 된다.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에는 파란만장한 인생들이 담겨있다. 한때는 엄마와 아빠도 꿈 많은 청년이었고, 첫사랑에 가슴 뛰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자식을 위해 기꺼이 꿈을 내어주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더 해주지 못한 걸 아쉬워한다. 딸 역시 부모의 희생과 사랑을 알기에 겉으론 툴툴대지만 뒤에선 눈물을 훔친다. 이 드라마를 보며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애달파 하고 눈물 흘리는 이유다.
이 작품에는 주인공 애순(아이유)과 관식(박보검) 외에도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이 참 많이 등장한다.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충수 이모다. 충수는 해녀 이모 중 최연장자인 상군 해녀다. 추상같은 기개를 내뿜지만 내면은 봄햇살처럼 따뜻한 여성이다. 긴 시간 쌓아온 삶의 지혜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애순과 관식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폭싹 속았수다'의 한 장면. 차미경(가운데)은 해녀 충수 이모를 연기했다.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를 보며 '대체 이 배우가 누굴까' 궁금해하던 시청자들이 많다. 사실 충수 이모를 연기한 차미경은 수십 년간 연극 무대를 누볐고 2007년 영화 '밀양'으로 데뷔한 베테랑 연기자다. 당시 이창동 감독이 4천 대 1의 경쟁률을 뚫었다고 말할 정도로, 조단역까지 탄탄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로 꾸려졌다. 지금은 주연 배우로 자리매김한 이성민이 단역으로 출연했고, 김종수·오만석·조영진 등 다양한 배우들이 나온다.
이후에도 차미경은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활약했다. 워낙 캐릭터에 따라 이미지가 급변하는 탓에 동일 인물인지 못 알아보는 이들도 많다. 배우로서 축복받은 능력이지만, 이름 석 자를 널리 알리는데 조금 더뎠던 것도 같은 이유다. 그는 드라마 '굿파트너' '수사반장 1958'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마당이 있는 집' '그 해 우리는' '옷소매 붉은 끝동' '이태원 클라쓰', 영화 '장손' '교토에서 온 편지' '브로큰' '소원' '암수살인' '82년생 김지영' '세자매' '3일의 휴가' 등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최근 본지와 단독으로 인터뷰를 가진 차미경은 자신의 인생사와 '폭싹 속았수다'에 대한 이야기들을 맛깔나게 들려줬다. 두 시간 남짓 진행된 대화의 끝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한 여운이 남았다. 우리가 사랑한 '충수 이모'가 탄생하기까지, 차미경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4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난 차미경은 집안의 '대장'이었다. 지금도 동생들은 누나를 막 대하지 못한단다. 막냇동생은 현재 뮤지컬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폭싹 속았수다'를 본 동생들은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작품을 보니 엄마 생각이 너무 나서 힘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제껏 본 누나의 작품 중에 최고였다는 칭찬과 함께. 직접 연기한 입장에서도 뿌듯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스무 살 때부터 연극 무대에 섰으니 40년간 연기를 한 셈이다. 사실 차미경은 '부산 연극의 중심'이라 불리는 가마골소극장의 1호 배우다. 연기는 물론 극장의 온갖 살림을 도맡았다. 밥도 직접 하고 포스터도 붙이고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삐 살았다. 차미경은 "연극이 아닌 다른 삶은 생각을 안 해봤다. 당시엔 연애도 하면 안됐었다"고 회상했다.
차미경이 인터뷰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디퍼런트컴퍼니 제공
나이를 뛰어넘는 연기는 이미 그때부터 시작됐다. 20대 초반에 그로테스크한 50대 엄마를 연기했고, 할미전의 할미 역도 맡았다. 스물 세 살 땐 부산 연극제에서 관객이 뽑은 최고의 배우상을 받기도 했다. 자연스레 할머니 역과 친숙해진 차미경은 "삶의 현자 아닌가. 할머니를 연기하는 게 좋다"라며 웃었다.
연극 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영화 '밀양' 오디션 제안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거절했다. 아이를 좀 키워놓고 연극 무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인들의 "밥이나 먹자"는 말에 찾아갔다가, 대사가 적힌 종이를 받아서 읽었고 배역을 따내게 됐다. 모든 것이 얼떨결에 이뤄졌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운명이었다.
이후 다수의 작품들을 거친 차미경은 어떤 역할이든 자연스레 소화하며 극에 녹아들었다. 그는 "드라마 '그해 우리는'도 현장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마치 소프트 아이스크림 같았다. 감독님 이하 최우식도 너무 좋고, 김다미도 얌전하게 열심히 일했다. 좋은 배우"라며 "영화 '3일의 휴가'에선 신민아와 호흡을 맞췄는데 나랑 잘 맞았다. 차분하고 진정성 있고 깊이 있게 연기하는 배우다. 진짜 딸처럼 느껴지더라. 내가 여주인공 복이 있다 보다"라며 웃었다.
차미경이 출연한 '그 해 우리는' 속 한 장면. SBS 방송 캡처
차미경이 출연한 독립영화 '장손'은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을 이어가며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장손'은 두부 공장을 운영하는 집안의 이야기를 그린 가족영화로 대가족의 70년 묵은 비밀을 다룬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3관왕을 차지한 것은 물론 백상예술대상 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다. 사실 이 작품을 촬영할 때 차미경은 무척 힘든 시기였다.
"오정민 감독이 ('폭싹 속았수다'의) 김원석 감독의 에너지와 비슷했어요. 그때 전 엄마가 돌아가시고, 엄청 피폐하고 처음으로 무너진 상태였죠. 영화에서도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따돌려지는 역할이었어요. 고생만 죽어라 하는 맏딸이 잔다르크처럼 일어나는 상황이었는데, 그때는 (나 자신이) 즐겁고 좋은 에너지가 아니었거든요. 감독이 그조차도 잘 끌고 가더라고요. 제가 히스테리도 부렸는데 위로하면서. 전 그걸 에너지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 영화도 4계절을 담아요. 감독의 힘이 중요하다는 걸 다시 느꼈습니다."
차미경의 차기작은 tvN 드라마 '미지의 서울'이다. 배우 박보영과 호흡을 맞춘다. 오는 9월 방영 예정인 SBS '키스는 괜히 해서'에도 출연을 확정했다. 그는 "박보영도 정감 있고 참 좋은 배우다. 드라마가 곧 공개될 예정인데 기대가 된다"며 "'키스는 괜히 해서'에선 안은진의 엄마 역을 맡았다. 사실 내 나이에 하기가 어려운 건데 50대 엄마 역할이다. 너무 좋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설렘을 표했다.
연극 무대를 누비던 시절 차미경의 별명은 '탱크'였다. 열정과 추진력, 강인하고 호탕한 성격 덕분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성격이 바뀐다며 웃는 그는 실제로 사랑스럽고 귀여운 면모가 많았다.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할 것"이라는 '천생 배우' 차미경의 차기작들이 무척이나 기대된다.
유수경 기자 uu8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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