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터 연합뉴스
유럽연합(EU)은 러시아가 미국과 한 협상에서 우크라이나와의 흑해 휴전 조건으로 내건 제재 완화 조처는 없을 것이란 점을 26일(현지시각) 분명히 했다.
이날 아니타 히퍼 유럽연합 외교안보담당 수석 대변인은 입장문을 내어 “우크라이나 전 영토에서 모든 러시아 군대가 조건 없이 철수하는 것이 제재 개정 또는 해제의 주요 전제 조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5일 러시아 크렘린궁이 흑해 휴전을 위해 요구한 제재 해제 조건의 이행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히퍼 대변인은 “러시아는 불법적이고 도발적인 침략 전쟁을 끝내기 위한 진정한 정치적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난 23∼25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미국과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고위급 실무 회담이 끝난 뒤 미국과 러시아는 내용 발표를 따로 했다. 러시아는 미국과 협상한 내용이라며 흑해 해상 휴전안을 발표했는데, 여기엔 러시아 금융 기관을 비롯해 식품, 비료 등에 부과되는 제재 해제가 선결돼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러시아가 말한 제재 문제는 유럽의 동의와 결정 없이는 대부분 해결이 어렵다. 러시아는 자국 은행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스위프트·SWIFT)에 다시 연결시키는 조건을 요구했다. 그러나 벨기에 본사를 둔 스위프트는 유럽연합 관할권에 있기 때문에 미국은 영향력이 없다. 유럽연합은 러시아 은행과 금융서비스, 러시아 국적 선박과 항공기, 농기계, 에너지 등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제재를 가하며 러시아의 세계 시장 진입을 제한할 수 있었다. 때문에 러시아는 흑해 휴전을 수단 삼아 서방 제재 완화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과 유럽이 직접 협상을 해야 하는 문제인만큼, 두 동맹의 틈을 더욱 벌리고 그 사이 전쟁을 계속할 시간을 버는 목적일 수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보도했다. 최근 미국의 외보·안보 각료들이 민간 메신저 대화방에서 유럽을 “한심하다”고 폄하하는 등의 내용까지 유출되면서, 유럽과 미국의 관계는 더욱 껄끄러워진 가운데 유럽을 상대해야 하는 미국의 과제도 무겁다.
미국은 러시아의 요구가 갖는 맹점을 인정했다. 이날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자메이카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의 요구 조건을 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간단하지 않은 문제다.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우리는 (러시아 요구를) 평가할 것이다. 조건 일부는 미국과 무관한 제재가 포함됐다. 이는 유럽연합에 속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은 보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러시아가 지연 전략을 지적했다. 흑해 휴전 등에 관한 미국 보도자료와 러시아 크렘린궁의 발표가 순서대로 나온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뉴스맥스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이 사태의 종식을 원하지만,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내가 그것을 수년간 해 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난 계약에 서명은 하고 싶지 않고, 이 게임에 계속 남고 싶지만 잘 모르겠다”고 했다. 앞서 미국 백악관은 러시아의 농산물과 비료 수출을 위한 세계 시장 및 결제 시스템 접근성 강화 등을 지원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러시아가 발표한대로 구체적인 제재 완화 등의 조건은 따로 밝히지 않았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리야드에서 열린 연쇄 회담에서 제재 완화는 동의된 바 없다고 주장했다.
베를린/장예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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