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이 만난 사람]
소록도에서 애양병원까지 의술 50년
서울대 졸업식에서 祝辭 한 의사 김인권
2025년 3월 19일 오후 경기도 용인 서울예스병원에서 만난김인권 원장은 "환자가 나의 가장 큰 스승"이라고 했다. 그는 칠십 중반인 지금도 환자를 위해 '서서' 진료한다. /장련성 기자
의사 김인권은 서울대 졸업식 축사를 두 번 했다. 여수애양병원장 시절이던 2016년엔 “너무 좋은 직장 찾지 말라”고 해서 모든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올해 졸업식에선 “자기가 가진 지식이 최선이라는 오만을 버리자”고 했다. 분열된 한국 사회를 향한 일침으로 들렸다. 서울대 졸업식에서 두 번 축사 한 건 드물지 않으냐 묻자, “내가 9년 전에도 축사 한 걸 서울대가 까먹은 모양”이라며 웃었다.
◇ 法만 있고 仁은 없는 나라
-탄핵 정국이어서 그런지 축사가 의미심장했다.
“우리 사회의 이분화, 양극화는 나만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는 오만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다 함께 숨을 고르면서 서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내 생각이 60%면 상대 생각도 40% 받아줘야만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
-둘로 갈라진 광장은 증오와 혐오로 가득하다.
“우리가 그 혹독한 세월을 겪고 이겨내면서 잘 살아왔는데, 정치나 이념 문제로 죽일 듯이 싸운다면 너무 슬픈 일 아닌가. 자손들에게 부끄러워지면 안 된다.”
-‘공동의 선’을 찾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다.
“대통령을 비롯해 우리 국회의원의 20%가 법조인 출신이라고 들었다. 나는 법률가라면 뭐든 명쾌하게 판단할 거라 믿었는데 어찌 된 게 더 시끄럽더라(웃음). 내가 고전을 좋아하는데, 진시황의 진나라가 15년 만에 망한 건 백성을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아닌 법으로만 혹독하게 다스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싸우고 짓밟고 처벌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얘기다. 정치와 교육에서 ‘인의예지신’을 복원해야 한다.”
-정치력 부재라고도 한다.
“옛날 유진산이라는 야당 정치인이 있었다. 어른들이 그를 ‘사쿠라’라고 조롱했던 기억이 난다. 야당인 척하면서 여당에도 붙는다고. 학생인 우리 눈에도 유진산은 능글능글해 보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유진산처럼 양쪽 얘기를 다 듣고 지혜롭게 중재하는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된 것 아닌가 싶다.”
-의료계도 암울하다. 전공의들은 여전히 강경하다.
“정부에 있는 사람들이 참 고압적인데, 저렇게 원점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으면 전공의들도 돌아와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한 치 양보 없이 끝장을 보겠다고 하면 파국으로밖에 더 가겠나.”
-의대생 증원은 잘못됐다고 보시나?
“병원을 운영하는 처지에서는 의사 부족을 실감한다. 특히 지방에서 그렇다. 그런데 그 규모가 300~500명 정도였지, 2000명은 아니었다. 왜 2000명인지 설득하지 않고 밀어붙이기만 한 대통령의 미숙한 행정력, 융통성 없음이 정부와 의료계의 소통을 막았다.”
-의사와 환자들, 국민 사이의 신뢰도 많이 허물어졌다.
“의사는 생계를 위한 직업인 동시에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희생을 요구받는다. 왜 의사가 되려고 했는지, 그 첫 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록도에서 여수애양병원, 미얀마·라오스 의료 봉사까지 당신의 50년 의술 인생은 헌신의 연속이었다.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만난 사람들이다. 국립소록도병원의 신정식 원장님과 마리안나·마가레트 수녀님, 여수애양병원의 스탠리 토플 원장님과 유경훈 원장님. 의사로 살아가는 기쁨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준 분들이다. 우리 후배들도 그런 훌륭한 선배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김인권 서울예스병원 원장이 지난 2월 26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제79회 학위수여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가진 지식이 최선이라는 오만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듣고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뉴스1
◇ 두 수녀, 마리안느와 마가레트
-왜 의사가 되셨나?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의사였다. 특히 정형외과 의사였던 작은아버지를 좋아했다. 환자에게 늘 다정하셨고, 80대까지 일하시며 누구에게도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다. 저런 의사라면 나도 돼보고 싶었다.”
-1977년 소록도로 무의촌 봉사를 간 것이 운명이 됐을까.
“서울대가 소록도병원으로 처음 파견한 레지던트 3명 중 하나였다. 녹동항에서 배를 탈 때는 암담하고 무섭기만 하더니, 나환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더라. 말도 잘 통해서 6개월 동안 신나게 일했다.”
-3년 뒤 공중보건의로 다시 소록도에 갔더라. 아내와 갓 태어난 딸과 함께.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간 것이다. 한센병 환자들의 굽은 손을 펴주고 싶었다. 신정식 원장님은 군인 신분인 나를 인도에 보내 나환자 재활 수술을 배우게도 해주셨다.”
-첫 수술 환자였던 박용택씨 얘기가 인상 깊었다.
“서른 살 새파란 의사가 수술하겠다고 나서니 환자들이 다 도망가더라(웃음). 그때 술 먹다 사고를 친 용택씨가 병원으로 피신할 목적에 수술을 받겠다며 손을 들고 온 것이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이뤄지자 그다음부터 환자들이 줄을 섰다.”
-용택씨 말이 ‘피고름 나는 상처를 더러워하지 않고 코로 맡고 손으로 어루만지며’ 진찰했다고 하더라.
“환자의 상처가 왜 더러운가. 나는 진찰에 필요한 일을 했을 뿐이다.”
-간호사였던 마리안느, 마가레트 수녀님과도 가까우셨나?
“우리 식구에게 자주 빵을 구워 주셨다. 한번은 어느 환자가 수녀님들을 찾아와 ‘이번엔 꼭 성공할 테니 트럭을 한 대 살 수 있게 돈을 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사기꾼 같으니 조심하라’고 하자, 마리안느가 ‘우리도 안다. 하지만 누가 아나? 이번엔 성공할지’ 하면서 웃으시더라. 나이 들어 소록도에 짐이 될 수 없다며 손가방 하나씩 들고 본국으로 돌아간 그분들을 생각하면 죄송하고 부끄럽다.”
국립소록도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마가레트 수녀(왼쪽)와 마리안느 수녀. 1960녀대부터 간호사로 헌신한 그들은 노년에 소록도의 짐이 될 수 없다며 오스트리아 본국으로 돌아갔다. /조선일보DB
◇ 의사의 오만 일깨운 환자
-소록도 근무 기간이 끝난 뒤 왜 서울이 아닌 여수애양병원으로 가셨나?
“소록도보다 한센인 환자가 많은 애양병원은 늘 일손이 모자라 내가 일주일씩 파견을 갔다. 딸 들쳐업고 기저귀 가방 메고 배 타고 버스 타고 여수를 찾아갔는데, 나는 그 일이 귀찮지 않았다. 수술을 원 없이 할 수 있어 좋았다(웃음).”
-서울 대형 병원들 영입 제안에 마음이 흔들리진 않았는지.
“당시 애양병원 환자들 기도 제목이 ‘김인권 선생이 우리 병원으로 오게 해주세요’였단다. 의사는 자신을 간절히 원하는 환자들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나는 한센인 손을 펴는 수술에서는 1인자라고 자부하던 터였다(웃음).”
-월급은 적었을 텐데.
“애양병원에서 받은 첫 월급 명세서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130만원이 찍혀 있는데, 여수 인근 병원 의사들 월급의 6분의 1 수준이었다(웃음).”
-후회막심했을 것 같다.
“이른바 좋은 직장이라고 하면 뛰어난 사람이 많고 경쟁이 치열해서 자기 존재감을 나타내기 힘들다. 나는 자신의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곳이 좋은 직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너무 좋은 직장에 가지 말라’고 한 것이다(웃음).”
-하루 수술만 20건 이상 했다더라.
“한센병, 소아마비, 관절 환자들까지 하루 300명씩 찾아왔다. 수술 일정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놨다고 원장님께 혼나기도 했지만 그때는 의료보험도 안 되고 전국 병원을 돌다가 재산 탕진하고 온 환자가 많아 매몰차게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내가 수술을 빨리, 잘하기도 했고(웃음).”
-함께 일하는 의사들, 간호사들은 힘들었을 텐데.
“기독교 병원의 힘이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는 신앙으로 무장했기 때문일 것이다(웃음).”
-의사로서의 오만을 일깨워준 환자도 있었다고.
“척추 결핵을 앓는 환자였는데 종교적 이유로 수혈을 거부했다. 내가 ‘수혈 없이는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하자, 모든 병원에서 거절당하고 마지막으로 당신을 찾아 여기까지 왔는데 ‘차선의 수술법이라도 있을 것 아니냐’고 하더라. 그러고 보니 수혈 없이 가능한 옛날식 수술법이 있었고, 우리는 성공했다. 환자의 처지보다 내 방식만 고집하려던 오만을 그때 버렸다.”
2010년 8월 여수애양병원장 시절의 김인권. 하루 300명씩 전국에서 몰려온 환자들로 하루를 전쟁처럼 보냈지만 가장 행복하고 보람있는 시기였다고 했다. /조선일보DB
◇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
-큰 상을 여러 번 받으셨던데, 상금을 다 기부해서 가족들은 서운했을 것 같다.
“아내에겐 내가 주장할 게 하나도 없다. 애들 졸업식에 가본 적 없고, 은행 업무도 할 줄 모른다. 내가 당장 죽어도 우리 집은 아무 문제 없이 굴러간다(웃음).”
-상금 일부를 간송재단에 기부하셨더라.
“문화재를 좋아해서 최완수 선생인 간송재단 계실 때 기부했다. 문화재청장 지낸 정재숙씨와도 알고. 병원에만 있다가 그분들 만나 이야기하면 오아시스를 만난 듯했다. 요즘은 단소를 배운다.”
-애양병원 퇴임 후 용인의 서울예스병원으로 오셨더라.
“아내가 고생했으니 그만 쉬라고 해서 시골에 20평짜리 집을 짓고 농사 지으며 석 달을 살았다. 그런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 나는 병원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웃음).”
-지금도 설 연휴가 있는 주엔 해외 진료 봉사를 가신다고.
“애양병원 시절 중국 옌볜에서 시작한 봉사가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라오스로 이어졌다.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 의료 봉사를 해준 나라들에 대한 내 나름의 보답이다.”
-올해 축사에선 ‘피스 메이커(peacemaker)가 되라’고도 하셨다.
“마태복음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는 구절이 있다. 병실에도 피스 메이커가 있다. 한 방에 보통 5명씩 입원해 있는데 똑같은 수술을 받고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환자가 있는 방은 웃음이 넘치고, 운동도 열심히 한다. 그런데 불평만 하는 환자가 있는 방은 한숨과 욕설로 가득하다. 적어도 남을 해롭게 하는 전염병 같은 사람, 트러블 메이커가 되지 말자는 뜻이었다.”
-칠십대 중반이시다.
“노마지지(老馬之智). 늙은 말이 길을 안다(웃음).”
-인생은 무엇인가?
“살아보니 별것 아니더라. 그렇게 드라마틱하지도 않더라. 아득바득 살 필요도 없다. 저기 아버지 사진이 걸려 있는데, 말년의 아버지보다 지금 내 머리숱이 더 많고, 아버지보다 5년 더 살고 있으니 감사하다(웃음). 제일 감사한 건, 오늘도 아침에 눈을 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축복이 별건가? 내가 세상과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다.”
김인권 원장은 시종 따뜻하고 선한 웃음을 지었다. 세월이 흘러도 늙지 않는 것 같다고 하자 "우리 아내 말이, 내가 속이 없어서 그렇대요"라며 웃었다. /장련성 기자
☞김인권
1951년 서울 출생. 서울대 의대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립소록도병원을 거쳐 1983년부터 여수애양병원에서 36년 동안 한센인과 소아마비, 기형 환자들을 치료했다. 2019년 애양병원에서 퇴임한 뒤 서울예스병원 관절센터에서 의술을 이어가고 있다. 5만건에 이르는 인공 관절 수술을 집도한 명의로, 국민훈장 무궁화장, 장기려 의도상, 성천상 등을 받았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주 일요일 밤 0시에 랭킹을 초기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