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과학자에게 묻다] [4]
반도체 설계 분야의 권위자
석민구 美 컬럼비아대 교수
반도체 설계 분야 권위자로 꼽히는 미국 컬럼비아대 전기공학과 석민구 교수는 최근 연구실에서 가진 본지 인터뷰에서 한국에서도 비메모리 반도체 경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했다./윤주헌 기자
지난해 전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는 약 910조원(조사업체 가트너 기준). 이 시장은 크게 ‘메모리’와 ‘비(非)메모리’로 나눌 수 있다. 메모리는 한국 업체가 60% 이상 장악하고 있는데, 전체 시장에서 비율은 25.2%에 그친다. 비메모리의 상황은 반대다. 비율은 74.8%나 되지만, 한국 기업 점유율은 3%에 그친다. 미국 컬럼비아대 전기공학과 석민구 교수(46)는 비메모리, 특히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소장 학자다. 과학·기술 분야 최고상 중 하나인 미국과학재단(NSF) 젊은과학자상을 2015년 받았다. 최근 컬럼비아대 연구실에서 만나 해외에서 본 한국의 반도체 경쟁력에 대해 물었다.
-한국에선 인공지능(AI) 반도체 경쟁력에 대한 우려가 크다.
“AI 반도체도 기본적으로 비메모리 반도체다. 한국의 비메모리 경쟁력은 세계적 수준에 한참 뒤처져 있다. 한국 기업의 비메모리 분야 점유율은 3% 수준이다. 미국 반도체 전문가를 만나도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비메모리를 의미 있게 하는 한국 회사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 AI 칩 설계하는 한국 스타트업들, 예컨대 퓨리오사나 리벨리온 같은 이름이 간혹 언급되는데, 반가웠다.”
-한국이 메모리 말고 비메모리도 꼭 해야 하나.
“메모리는 기본적으로 경쟁자를 가격으로 누르는 ‘치킨 게임(극단적 경쟁)’ 시장이다. 한국 메모리 점유율은 60% 정도 되는데, 메모리는 ‘시장 지배력이 언제까지 될까’ 계속 불안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기업은 오랫동안,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을 원한다. 그게 비메모리 반도체다. 한국이 계속해서 반도체 산업에서, 특히 AI 반도체에서 영향력을 가지려면 비메모리는 필수적이다.”
-한국은 비메모리가 왜 약할까.
“인재·자본 등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나는 한국의 ‘산업 생태계’를 지적하고 싶다. 팹리스(반도체 설계)는 대기업의 자본도 필요하지만, 기술이 중요한 분야다. 기술이 있다면, 작은 기업도 도전할 수 있고, 선두 주자가 큰 혜택을 차지한다. 시장의 니즈(원하는 것)를 파악해 ‘내가 이런 걸 만들면 물건을 사줄 사람이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기존 기업에서 일하던 전문가나, 막 졸업한 박사들, 그리고 교수들이 팀을 짜서 VC(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를 받아 사업을 시작한다. 빌 게이츠 같은 유명 기업인도 좋은 기술 가진 스타트업에 적은 돈이나마 투자를 한다. 이 팹리스 스타트업의 성공 가능성이 보이면, 다른 빅테크나 대기업이 인수를 하고, 창업자는 큰돈을 번다. 한국에는 이런 ‘산업의 생태계’ ‘산업의 사이클’이 없다.”
그래픽=송윤혜
-왜 한국엔 없다고 생각하나?
“보통 스타트업을 창업하거나 투자해서 엑시트(exit·투자금 회수)하는 데 빠르면 3~5년, 아니면 10년쯤 걸릴 수 있다. 한국은 엑시트를 해야 할 때 엑시트를 못 하는 게 가장 큰 문제다. 한국에선 스타트업 창업자가 기업을 매각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문화가 있는 것 같다. 직원이나 주주들을 두고 혼자 돈을 챙기는 것처럼 본다고 할까. 창업자가 정상적으로 기업을 매각해서 큰돈을 버는 사례가 많아야 더 많은 사람이 창업에 도전하고, 공학을 전공하려 할 텐데 말이다. 스타트업을 살 만한 기업이 부족한 것도 한국의 약점이다.”
-해외 기업에 팔면?
“최근에 그런 움직임이 있다. 실제 결과는 두고 봐야겠지만 퓨리오사를 메타가 사려고 한다는 얘기가 최근 있었다. 개인적으로 좋은 선례라고 본다. 일부에선 이를 ‘기술 유출’이라고 하는 지적도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스타트업이 제때 엑시트를 못 하면 나중에 결국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끝까지 생존해서 상장에 성공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사업가가 짊어지고 가기엔 너무 큰 리스크다. 결국 스타트업이 좋은 기술을 개발해 창업자와 투자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엑시트를 하는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굳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이 팹리스를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석 교수는 2년 전 한국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컴퓨터공학도로서의 후회와 기쁨’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그 강연에서 그는 ‘공학을 공부해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활동하면 의사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기업에 가면 훨씬 많은 돈을 벌 텐데, 학교에 있는 이유는
“(웃음) 아직은 학교에서 하고 싶은 공부가 많다.”
-한국에선 좋은 인재들이 공학을 기피하는 현상이 있다.
“학생들은 현실적이다. 이 분야가 정말 좋든지, 아니면 돈을 많이 번다든지 이런 식의 이유로 선택한다. 그 분야로 학생들이 몰려야 하는데, 지금 한국에서 공학은 약간 애매하다. 한국 이공계 인재들이 다들 의대로 가려고 하는 건 결국 안정성과 돈 때문이다. 어른 세대가 학생들의 눈을 뜨게 해줘야 한다. 한국에서 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없애고, 해외로 나가 도전할 수 있다고 알려줘야 한다. 미국에선 아주 높은 위치도 아니었는데 50만달러(약 7억3000만원)를 번다. 한국 부모님들도 이런 상황을 모르니까 자녀들에게 알려주지 못한다. 2년 전에 한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강연하며 미국 기술자 연봉 얘기를 했더니 앞줄에 앉았던 학부모가 깜짝 놀라더라. 해외로 나가는 걸 인재 유출로만 보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성공 사례가 많아야 더 많은 인재들이 공학을 전공할 것이고, 결국 한국의 인재도 풍부해진다. 또 해외로 나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전기 공학에서 미국과 한국 교육 차이가 있나.
“칩을 만들려면 옛날처럼 도화지에다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써야 한다. 미국은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대학에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공짜로 공급한다.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수 있는 라이선스(허가증)를 수백 개씩 주고 그 덕분에 학생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내가 서울대 학부생일 때도 소프트웨어가 충분하지 않아 실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실제로 칩을 디자인해서 시제품을 만들어 보는 수업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빅테크 기업이 시제품 제작 비용을 대주고, 이들이 나중에 학생들이 만든 시제품을 직접 평가한다. 그중 상당수는 그 기업에 취직된다.”
-한국에 돌아올 생각이 없을 정도로 컬럼비아대를 좋아하나?
“물론 한국 대학이나 기업에서도 가끔 이직 의향을 묻곤 한다. 야구 선수를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한국 리그에서 뛰는 선수도 있고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선수도 있지 않나? 나는 스스로 미국 리그에서 뛰는 한국 교수라고 생각한다. 이 자리에서 한국에서 오는 학생이나 연구진을 돕고 싶고, 한국 과학계에 기여도 하고 싶다.”
☞석민구 교수는
반도체 전압 장치 성능 1만배 개선… 美 과학재단서 ‘젊은 과학자상’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나와 미시간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박사과정 시절 단 두 개의 소자(素子)만을 필요로 하는 전압 기준 장치(Voltage reference)를 세계 최초로 발명했다. 이 발명으로 기존 장치의 성능을 1만배 이상 개선했고, 오늘날 다양한 컴퓨터 칩에서 사용된다. 2015년 미국과학재단(NSF) 젊은과학자상(CAREER Award)을 받았고, 고체회로학회(Solid-State Circuit Society) 저명 강의자(Distinguished Lecturer)로 선정됐다. 현재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기술 학회인 전기전자공학자협회(IEEE) 시니어 멤버로 활동 중이다.
☞메모리와 비(非)메모리
반도체 제품은 크게 메모리와 비(非)메모리로 나뉜다. 메모리 반도체는 데이터를 저장하는 역할을 하고, 주요 제품으로 D램과 낸드가 있다. 비메모리는 업계에선 공식적으로 ‘시스템 LSI’로 불린다. 연산, 제어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반도체로, CPU(중앙 처리 장치), GPU(그래픽 처리 장치) 등이 해당한다. 메모리가 양산형인 반면, 비메모리는 맞춤형이 많다. 팹리스 업체가 설계하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이 제품을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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