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선대회장처럼
'제2 프랑크푸르트 선언' 내놔
회장 취임 후 처음으로
삼성 조직의 문제 거론
대대적 경영쇄신 주문
"위기 때마다 작동하던
삼성 고유의 회복력 없어
이젠 수시 인사 하겠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그룹 임원에게 “모든 분야에서 기술 경쟁력이 훼손됐다”며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과감한 혁신과 새로운 도전은 찾아볼 수 없고, 판을 바꾸려는 노력보다 현상 유지에 급급하다”는 통렬한 자기반성과 질책도 쏟아냈다. 삼성 내부에서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고 한 1993년 고(故) 이건희 선대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삼성 오너가 임직원에게 건넨 가장 강도 높은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시장에서는 경쟁력 회복을 위한 큰 폭의 조직 개편과 경영진 인사가 뒤따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17일 산업계에 따르면 삼성은 지난달 말부터 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생명 등 전 계열사 임원 20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 중인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 교육’에서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이 회장의 영상 메시지를 공유했다. 이 회장은 영상에서 “삼성은 ‘죽느냐, 사느냐’는 생존 문제에 직면했지만, 위기 때마다 작동해 온 삼성 고유의 회복력은 보이지 않는다”며 “경영진부터 철저히 반성하고 사즉생의 각오로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2022년 회장에 취임한 그가 삼성의 위기를 직접 거론하며 대대적인 쇄신을 주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산업계는 “지금 바뀌지 않으면 삼성이 영영 경쟁력을 되찾지 못할 수 있다는 절박감이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룹의 맏형인 삼성전자는 고부가가치 메모리 제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 SK하이닉스에 밀리고,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에서 대만 TSMC에 치이는 등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범용 D램에서는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 등 중국 업체에 턱밑까지 쫓기는 형국이다.
이 회장은 위기 극복의 해법으로 기술 경쟁력 회복과 인재 경영을 꺼냈다. 이 회장은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 셋째도 기술”이라며 “국적과 성별을 불문하고 경영진보다 훌륭한 특급 인재를 양성하고 모셔 와야 하고, 필요하면 인사도 수시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기극복 DNA' 깨운 이재용 "혁신 실종…독한 삼성인이 되자"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기술"
< 삼성전자 주가 반등 > 17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한 직원이 삼성전자 주가를 확인하고 있다. 이날 삼성전자 주가는 반도체 회복 기대감에 힘입어 5.3% 오른 5만7600원에 거래를 마쳤다. 강은구 기자
삼성그룹 임원들의 책상에 ‘위기에 강하고 역전에 능하며 승부에 독한 삼성인’이란 문구가 담긴 크리스털 패가 놓이기 시작한 건 지난달 말부터였다. 삼성그룹의 모든 임원 2000여 명을 대상으로 순차 진행 중인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 교육’ 참석자에게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건넨 선물이다. 지금 삼성의 상황을 “‘죽느냐, 사느냐’란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고 진단한 이 회장이 위기 돌파의 선봉에 서야 할 임원들에게 주문하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산업계에선 이 회장의 이번 메시지가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일으켜 세운 전환점이 된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1993년 6월)과 비슷한 위기 극복의 계기가 될 것이란 기대를 내놓고 있다.
◇ “삼성전자, 제 역할 다하고 있는가”
하루짜리 일정의 ‘삼성다움’ 교육은 영상과 외부 전문가 강연으로 구성된다. 이 회장의 메시지는 이병철 창업 회장과 이 선대 회장의 경영 철학이 담긴 영상 중간에 들어 있다. 올초 삼성 사장단 세미나 때 처음 공개한 영상을 임원 교육에 다시 공유한 것이다.
메시지는 ‘위기의식’으로 시작한다. 이 회장은 “21세기를 주도하며 영원할 것만 같던 글로벌 30대 기업 중 24개가 새로운 혁신 기업에 의해 무대에서 밀려났다”며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변화에 제때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1999년 말 기준 글로벌 시가총액 30대 기업 중 작년 말에도 리스트에 오른 기업은 마이크로소프트(MS), 엑슨모빌, 월마트, 홈디포, 프록터앤드갬플(P&G), 존슨앤드존슨(J&J) 등 6개뿐이다. 노키아, 인텔 등 최강 정보기술(IT) 공룡조차 엔비디아(1999년 나스닥 상장) 같은 신흥 강자에 밀렸다. 삼성도 뒤로 밀린 24개 기업처럼 될 수 있다고 이 회장은 걱정했다. 그는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경제와 산업을 선도해야 할 삼성전자는 과연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삼성의 현실에 대해 냉정한 평가가 이어졌다. 그는 “전 분야에서 기술 경쟁력이 훼손됐고 과감한 혁신이나 새로운 도전은 찾아볼 수 없다”며 “위기 때마다 작동하던 삼성 고유의 회복력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 회장의 걱정에는 다 이유가 있다. 주력 제품 점유율이 일제히 하락하면서 ‘근원 경쟁력’을 의심받고 있어서다. 삼성전자의 TV 점유율은 2023년 30.1%에서 2024년 28.3%로 떨어졌고, 같은 기간 스마트폰(19.7%→18.3%), D램(42.2%→41.5%)도 하락했다. 삼성 임원 교육에 ‘외부 전문가들이 바라보는 삼성의 위기’ 프로그램을 넣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 자리에선 “실력을 키우기보다 ‘남들보다만 잘하면 된다’는 안이함에 빠진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 위기 극복 해법은 기술과 인재
이 회장은 위기 극복의 해법으로 ‘기술’과 ‘인재’를 꼽았다. 이 회장은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 셋째도 기술”이라며 “경영진보다 더 훌륭한 특급인재를 국적과 성별을 불문하고 양성하고 모셔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 안팎에선 이 회장의 메시지에 대해 “이 선대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떠올리게 한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이 선대 회장은 1993년 1월 미국 로스엔젤레스(LA) 가전매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구석에 밀려난 삼성전자 가전을 직접 목격하고 위기의식을 불어넣기 위한 강도높은 임원 회의를 열었다. 5개월 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삼성전자의 품질 불량 실태를 적나라하게 담은 일본인 고문 후쿠타 다미오의 ‘경영과 디자인’ 보고서를 읽고는 전 임원들을 소집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말했다. ‘삼성 신경영’ 선언이다. 이후 질(質) 위주 경영에 나서면서 강도 높은 삼성의 혁신에 나서며 삼성을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이 회장의 강도 높은 혁신 메시지를 내놓은 만큼 대대적인 조직 개편과 후속 인사가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 회장은 “성과는 확실히 보상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신상필벌이 삼성의 오랜 원칙”이라며 “필요하면 인사도 수시로 해야한다”고 했다. 산업계에선 5~6월께 조직 개편과 사장단 인사가 나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김채연/황정수/박의명 기자 why2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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