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유럽·중앙아시아 홍역 감염 사례 급증
접종률 95% 미만…집단 면역 부족
정치권 가짜뉴스…질병 극복에 걸림돌
최근 미국에서 텍사스주를 중심으로 홍역 환자가 급증했다. 지난해에는 유럽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홍역 감염 사례가 2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전 세계가 비상에 걸렸다./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최근 미국에서 텍사스주를 중심으로 홍역 환자가 급증했다. 지난해에는 유럽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홍역 감염 사례가 2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전 세계가 비상에 걸렸다.
홍역은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호흡기 감염병이다. 코로나19처럼 기침, 재채기로 감염될 정도로 전염성이 강하다. 감염되면 발열·발진이 나타나고 입 속에서 회백색 반점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면역력이 약한 영·유아는 폐렴, 중이염, 뇌염 등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다.
보건당국은 생후 12~15개월, 4~6세는 총 2회에 걸친 백신 접종을 권고하고 있다. 홍역 백신(MMR) 1차 접종 시 93%, 2차 접종까지 마친 사람은 97%까지 예방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백신을 둘러싼 가짜뉴스가 확산하면서 홍역 백신 접종률이 낮아졌다고 본다.
◇홍역 감염자, 백신 미접종자가 대부분
13일(현지 시각)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지난 1월 말 미국 남부 텍사스주에서 시작된 홍역 감염 사례가 두 달 만에 250명 이상으로 늘었다. 2월 말 텍사스주에서 1명, 3월 초 남서부의 뉴멕시코에서 1명이 각각 사망했다. 미국에서 홍역으로 사망자가 나온 건 10년 만에 처음이다. 현재 홍역은 중남부에 위치한 오클라호마주까지 퍼졌으며, 동남부 조지아주, 서부 뉴저지주에서도 일부 사례가 확인됐다.
홍역 유행이 심각한 건 미국만이 아니다. 이날 세계보건기구(WHO)와 유니세프(UNICEF)도 보고서를 통해 지난해 유럽·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홍역 환자 수가 두 배로 늘어 25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이 지역 53국의 홍역 사례는 총 12만7350건으로, 이 중 38명이 사망했다. 가장 많은 환자가 발생한 국가는 루마니아(3만692건)였고, 러시아, 카자흐스탄, 이탈리아가 뒤를 이었다. 지난해 전 세계 홍역 환자수는 33만4717명으로 집계됐다.
전문가들은 미국, 유럽 등에서 홍역 예방 접종률이 코로나19 대유행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아 홍역 환자가 급증했다고 분석햇다. 미국 홍역 환자 대부분은 17세 미만 어린이·청소년으로, 전체 환자 중 96%는 홍역 백신을 접종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사망자 2명 역시 미접종자였다.
유럽·중앙아시아 지역 감염자 역시 대부분이 미접종자이거나 접종 상태가 불분명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발병 건수 가운데 40%가 5세 이하 어린이였다. 한스 헨리 클루게(Hans Henri Kluge) WHO 유럽국장은 성명에서 “이번에 공개된 홍역 통계는 홍역이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이자, 우리 모두에게 경각심을 주는 신호”라며 “높은 예방접종률 없이는 보건 안전도 없다”고 지적했다.
홍역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충분한 인구가 면역력을 갖는 집단 면역을 달성해야 한다. 인구의 95% 이상이 홍역 백신을 접종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미국은 코로나19 대유행 기간 홍역 백신 접종률이 93% 아래로 떨어져 아직까지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유럽에서도 2019~2023년 홍역 예방접종 1차 접종을 받은 어린이 수가 10% 줄었다. 2023년에는 50만 명의 접종 대상 어린이가 홍역 백신 1차 접종을 받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WHO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루마니아에서 2023년 어린이 홍역 예방 접종률이 80% 미만이었다”며 “발병 예방을 위한 접종률 95%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은 집단면역이 확보되는 95% 이상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홍역 2차 예방접종률은 96.1%에 달한다. 국가필수예방접종(NIP) 프로그램에 포함된 홍역 백신 접종은 12~15개월에 1차 접종, 4~6세에 2차 접종을 시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 홍역 환자는 지난해 49명, 올해는 지난 10일 기준 16명으로 집계됐다. 모두 해외여행을 다녀오거나 국내에서 환자와 접촉해 감염된 사례들이다.
지난 12일(현지 시각) 미국 폭스뉴스의 홍역 발생 현황 갈무리./폭스뉴스 캡쳐
◇“정치권의 가짜뉴스가 백신 접종 막아”
전문가들은 백신에 대한 가짜뉴스 확산이 유독 미국·유럽에서의 홍역 감염을 키웠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대표적인 반(反)백신론자인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가 보건부(HHS) 수장에 오른 뒤로 공중보건 전문가들의 우려를 키우고 있다. 케네디 장관은 코로나19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주장은 물론 연방기관이 홍역, 독감을 비롯해 다른 전염병의 백신에 대해 충분한 연구를 하지 않은 채 사용을 승인했다고 주장해온 인물이다.
그는 최근 미국 내 홍역 환자가 급증한 데 대해 “우리는 누구나 홍역에 걸렸고, 이후로 항체가 생겨 평생 홍역 감염으로부터 보호해줬지만, 백신은 그렇지 않다”며 “일부 사람들에게는 평생 효과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효과가 약해진다”고 말했다. 다른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홍역 증상 완화에는 여전히 좋은 영양 섭취와 비타민 A 치료가 도움이 된다”며 특히 간유(cod liver oil)의 효능을 강조하기도 했다.
필립 황(Philip Huang) 텍사스주 댈러스 카운티 보건복지국장은 “케네디 장관의 발언으로 최근 홍역 백신보다 비타민 A를 투여하는 부모가 늘고 있다”며 “이런 혼란스러운 메시지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피터 호테즈 텍사스 아동병원 백신개발센터의 공동 책임자는 케네디 장관의 발언이 “잘못된 정보”라고 반박하며, “홍역 백신은 아주 안전하고, 백신 반대론자들은 주로 부작용으로 겁을 주면서 질병의 끔찍한 영향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유럽도 상황은 비슷하다. 유럽정책분석센터(CEPA)는 보고서를 통해, 최근 루마니아 총선에서 의회에 진출한 세 개 정당이 반 백신 주장을 펼친 것이 지난해 홍역 환자가 3만 건을 넘어선 데 중요한 배경이라고 꼬집었다. 백신 회의론이 전국에 퍼지면서 2013~2023년 루마니아에서 홍역 백신 1차 접종률은 92%에서 78%로 떨어졌다.
파티마 쳉기치(Fatima Čengić) 유니세프 유럽·중앙아시아 지역 예방접종 책임자는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백신에 대한 많은 가짜뉴스가 나오면서 정기 예방접종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전이 효과’가 발생했다”며 “특이 어린 아이들이 질병을 예방할 수 있도록 부모들이 단순 구글 검색을 넘어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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