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과 만난 연극, 뮤지컬, 오페라
카메라로 생생히 담아낸 영상미학
클로즈업으로 섬세한 감정 전달
1분 1초, 1㎜의 오차도 허용 안해
뮤지컬 ‘틱틱붐’ [신시컴퍼니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나만 제자리야, 다들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혼자 제자리에서 벽에 머리만 찧고 있어.”
이제 막 서른이 된 ‘젊은 작곡가’가 있다. 수년째 ‘유망하다’는 찬사를 받지만, 한 번도 꿈을 펼치지 못한 청춘. 불안이 그를 엄습한다. 이대로 멈춰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쓸모를 증명하지 못했다는 자괴, 이루지 못할 것 같다는 절망…. 수만의 감정이 그의 얼굴 위에 싸여 무대 위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달린다. 달리고 또 달린다. 친구의 투병을 알게 된 후, 말로 다 표현 못 할 슬픔을 안고 뉴욕의 거리를, 공원을 뛰어간다. 클로즈업한 얼굴로 내뱉는 독백 속에서 무대가 보여주지 않은 풍광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뮤지컬 ‘틱틱붐’, 브로드웨이의 천재 작곡가로 ‘렌트’를 쓴 조나단 라슨의 자전적 이야기다.
뮤지컬 무대로 ‘라이브 카메라’가 올라왔다. 그네와 미끄럼틀이 정글짐처럼 설치된 회전 세트 위에 설치된 카메라가 배우의 얼굴을 왼쪽, 오른쪽, 정면으로 담는다. 흔들리는 동공 사이로 드러난 수만의 감정이 ‘청춘의 포말’이 돼 객석으로 내려앉는다. 1004석의 극장 제일 뒷좌석에서도 무대 위 감정이 생생히 포착된 것은 실시간으로 촬영된 영상이 동시에 보여졌기 때문이다.
‘틱틱붐’의 이지영 연출가는 “한 사람의 서사로 쭉 이어지는 극이기에, 큰 공연장에서 인물의 내면이나 심리를 가깝게 따라갈 수 있도록 물리적 거리감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라이브 영상을 활용했다”고 말했다.
공연과 영상이 만났다. ‘하이브리드 장르’의 탄생이다. 하나의 보조장치이자 세트의 일부로 존재했던 영상은 라이브 카메라의 촬영을 통해 보다 진화한 형태로 자리하게 됐다. 최근 국내 무대에서도 연극, 뮤지컬, 오페라를 통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영상을 만들고 있다. 마지막 보루처럼 남아있던 ‘아날로그 무대’에 첨단의 영상이 개입하자, 공연은 관객의 상상력을 넓히고 몰입의 깊이를 달리 한다. 고정된 무대가 보여주는 미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영상을 통해 새로운 감각을 깨우는 것이다.
영화 ‘토토의 천국’(1991)으로 칸 영화제 황금 카메라상을 받은 세계적인 영화감독 자코 반 도마엘 자코 반 도마엘 감독과 미셸 안느 드 메이가 총체극 ‘콜드 블러드’로 한국을 찾았다. [Julien Lambert 제공]
무대와 만난 영상…라이브 필름 퍼포먼스가 뭐지?
일명 ‘라이브 필름 퍼포먼스’로 불린다. 공연 예술과 라이브 카메라의 결합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등장한 장르는 아니다. 유럽 무대를 중심으로 꾸준히 이어왔고, 지난 1~2년 사이 국내에서도 인상적인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최초의 시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이브 필름 퍼포먼스와 같은 ‘융합 장르’의 첫 출발은 체코 프라하의 라테르나 매지카 극장이었다. 1958년 설립한 라테르나 매지카는 세계 최초의 ‘멀티미디어 극장’이자, 같은 해 열린 엑스포58을 홍보하기 위한 문화 프로그램이었다. 공연 사상 처음으로 영화와 라이브 무대 공연을 결합한 형태였다. 이후 2010년대에 접어들며 유럽 무대에서 널리 활용돼왔다. 연극, 오페라는 물론이고 화려한 무대로 치장한 뮤지컬 장르에서도 속속 등장했다.
국내에서 연극과 라이브 필름이 결합된 형태가 처음 소개된 것은 2014년이다. 당시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개막작이었던 케이티 미첼의 ‘노란 벽지’였다. 연극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보여줬다.
2011년엔 영화 ‘토토의 천국’, ‘제8요일’을 찍은 벨기에 출신의 영화감독 자코 반 도마엘은 ‘키스 앤드 크라이’를 통해 보다 진화한 형태의 라이브 필름 퍼포먼스를 구현했다. 무용가인 아내 미셸 안느 드 메이와 함께 만든 작품이다. 다양한 미니어처 세트를 제작, 사람의 손가락을 의인화에 해당 세트에서 이야기를 펼친다. 미니어처 세트에서 벌어지는 스토리는 실시간으로 촬영, 무대 한가운데 매달린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보여준다. 공연 무대는 영화 촬영 세트장이 되고, 스크린은 실시간으로 촬영한 영화 한 편이 된다.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은 이러한 형식의 작품을 “일회성 영화”라고 정의했다. “사전 녹화 없이 무대 위 관객 앞에서 즉석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라는 의미다. 도마엘 감독은 지난해 12월 성남아트센터에서 ‘콜드 블러드’라는 같은 형식의 다른 작품을 들고와 한국 관객과 만났다. 완전히 진화한 형태의 라이브 필름 퍼포먼스다.
뮤지컬 ‘틱틱붐’은 라이브 카메라를 통해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며 관객의 몰입도를 높였다. [신시컴퍼니 제공]
연출가의 룰로 완성되는 라이브 카메라…영화인가 브이로그인가
‘때론 영화처럼, 때론 브이로그처럼.’
공연 관계자들은 “영상은 잘못 쓰면 독”이라며 “스크린을 통해 시각을 사로잡는 지배력이 큰 만큼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입을 모은다.
‘라이브 필름 퍼포먼스’는 장르와 극의 특성에 따라 촬영 기법은 물론 영상 미학도 달라진다. 최근 몇 달 사이 무대에 오른 작품 중 가장 효과적인 영상 활용법을 보여준 작품은 뮤지컬 ‘틱틱붐’과 오페라 ‘탄호이저’다.
무대 위 카메라의 기본 촬영법은 인물들의 클로즈업이다. 한국 뮤지컬 중엔 처음으로 라이브 카메라를 선보인 ‘틱틱붐’은 주인공 존이 독백을 할 때마다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인물의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이지영 연출가는 “‘틱틱붐’ 영상 촬영의 첫 번째 원칙은 얼굴이나 눈빛의 클로즈업을 통해 감정을 표출하는 모습을 중계하는 것으로 삼았다”고 했다.
효과가 상당하다. 뒷좌석 관객은 결코 볼 수 없는 떨리는 눈동자와 얼굴 근육이 카메라에 담겨 관객 앞에 펼쳐진다. 방황하는 서른살 청춘의 갈등과 고뇌를 담아낸 렌즈는 브이로그처럼 ‘날 것’의 분위기를 만든다. 이 역시 의도한 지점이다.
이 연출가는 “유튜브나 쇼츠 영상에서처럼 휴대폰 카메라 앞에 혼자 앉아 담담하게 생각과 감정을 표출하는 것에 익숙한 요즘 세대에게 존(주인공)이 카메라 한 대를 앞에 두고 심정을 토로하는 것처럼 다가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1990년의 이야기를 담은 만큼 캠코더의 배터리가 닳고 있는 표시까지 세심하게 살렸다.
오페라 ‘탄호이저’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의 ‘탄호이저’(24년 10월 개막)의 영상은 더 독특하다. 무대 위로 촬영 감독이 올라와 5㎏의 카메라를 들고 성악가들의 얼굴을 담는다. ‘탄호이저’ 속 영상은 1920~30년대 흑백영화처럼 감각적이다.
‘틱틱붐’이 대사를 뱉는 인물을 보여준다면, 오페라 ‘탄호이저’는 상대방의 노래를 듣고 있는 인물을 클로즈업해 그들의 감정선을 보여준다. 영상 없이는 가까이서 볼 수 없었던 상대 인물들의 감정을 마주하며 관객을 극 안으로 끌어들인다.
‘탄호이저’의 요나 김 연출가는 “화면 속 인물의 모습은 노래를 듣고 감정을 느끼는 관객들의 얼굴”이라며 “이들은 관객을 대표해 상대의 노래를 듣고 반응하는 감정의 매개체이자 통역사”라고 했다. 멀리 떨어진 좌석에선 다 보지 못하는 무대 위 인물들의 감정과 이야기를 생생하게 느끼게 한 효과적 장치였다.
영상을 활용하는 연출가들은 저마다의 ‘룰’을 가지고 있다. 뮤지컬과 오페라는 노래하는 장르임에도 ‘틱틱붐’과 ‘탄호이저’는 노래하는 배우들의 얼굴을 잡지 않았다. 두 작품의 연출가는 “영상 촬영의 첫 번째 원칙은 ‘노래하는 사람을 잡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연출가는 “영상이라는 것은 시각적 효과가 커 언제나 시선이 먼저 간다. 노래만이 전달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기에 노래할 때는 영상 없이 무대 위 배우를 보존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요나 김 연출가 역시 “상대방이 노래할 때의 가사와 음악이 전달하는 메시지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기 위해 극의 상황에 몰입한 캐릭터만 담았다”고 했다.
오페라 ‘탄호이저’ [국립오페라단 제공]
공연과 만난 영상은 무대 위 배우들의 얼굴을 포착하며 보다 내밀한 감정을 들여다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 반면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콜드 플레이’와 같은 작품은 완전히 다른 형태의 하이브리드 장르로 진화했다. 관객은 스크린을 통해 미니어처 세트에서 벌어지는 연극을 보되, 무대 위에선 영화 촬영 세트장을 보게 한다.
도마엘 감독은 “‘일회성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제작 과정과 스크린에 투사된 최종 결과물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라며 “이를 통한 이중적 해석은 관객에게 시선의 자유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1초ㆍ1㎜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생방송 무대
매일이 생방송이다. 1분 1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고, 기술적 오류 또한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규칙에 따라 움직여야 ‘완벽한 무대’가 완성된다. 완전 무결한 영상을 만들되, 적재적소에서 활용해야 ‘융복합 장르’로의 시너지가 살아난다.
무대 위에 카메라가 올라가면 무수히 많은 제약이 생긴다. 사실 카메라가 익숙하지 않은 배우들에게도 부담이었다. 특히나 클로즈업을 해서 카메라가 얼굴을 초밀착해 보여주니 보다 섬세한 연기를 해야 했다.
이지영 연출가는 “카메라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식하지 않고, 기존의 무대 연기보다는 카메라 각도에 맞춰 계산해야 하는 연기를 해야 하기에 배우들의 부담이 컸다”고 말했다.
‘콜드 브리드’ [성남아트센터 제공]
부담을 이겨낸 배우들의 감정은 ‘틱틱붐’을 빛나게 했다. 서른이라는 긴 터널 앞에 선 주인공 존의 답답하고 불안한 감정이 생생히 전달됐다. 스크린 가득 속눈썹의 떨림까지 포착되자, 뮤지컬은 특정 연령대의 이야기를 넘어 나의 이야기와 감정으로 치환돼 공감대를 높였다.
오페라 ‘탄호이저’에선 요나 김 연출가가 직접 성악가들의 연기를 지도했다. 일종의 ‘방과후 수업’이엇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성악가들이 담배를 드는 각도, 다리를 꼬는 방식까지 연습했다. 요나 김 연출가는 “사랑과 이별에 대한 성악가들의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맞춤형 연기지도를 했다”고 말해다.
철저한 동선의 계산과 작품의 이야기를 침범하지 않는 것도 관건이다. 연출가들은 기존이 무대 미학에서 벗어나 영상을 끌어오기 위해 수차례의 연습을 통해 1㎜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무대를 만든다.
이 연출가는 “고도의 계산과 서로의 약속을 통한 촬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도마엘 감독 역시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며 “세트를 언제 들여오고 이동하는지, 태양처럼 보이는 조명을 언제 설치하고 언제 카메라를 밀어야 하는지, 선풍기와 연기를 언제 사용하고 언제 안무를 따라야 하는지 파악하고 있다. 같은 게임을 계속 반복해서 연습하는 축구 경기와 비슷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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